만세운동 주도로 옥고 등 수난도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무기력하게 짖눌려온 굴종의 삶에 공동체적으로 저항했던 3.1운동. 성결교회가 타 교단에 비해 인력이나 물량 면에서 3.1운동에 상대적으로 적게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민족의 운명에 함께하려던 성결인들의 움직임은 뚜렷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3.1운동에 참여한 성결인 가운데 당시 젊은이들과 여성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참여한 젊은이들과 여성들은 기독교교육의 혜택을 입은 이들이었고 그만큼 정의에 대한 결단에 앞장설 수 있었다.   

성결교회 초기 청년과 여성들의 참여
한국성결교회의 개척자 중 한 명인 김상준은 1917년 성결교회를 떠나 순회부흥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3.1운동을 맞았다. 그는 당시 밀양으로 내려가 밀양교회를 개척한 강시영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모의했다.

강시영은 김상준의 고향친구로서 김상준의 전도로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김상준의 추천으로 경성성서학원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강시영은 고향인 평남 용강에서 내려온 애국지사들과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할 때 일본 순경의 감시를 피하여 방안에 볏섬을 쌓은 후 촛불을 켜놓고 회의를 진행했고 이를 통해 밀양지역에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김상준은 이 독립만세운동에 함께 참여해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투쟁했다. 이로 인해 김상준과 강시영은 일본 헌병보조들에게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백신영 전도사는 1919년 정신여학교에서 교사로서 일한 것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계기가 됐다. 3.1운동의 여파가 전국을 휩쓸고 지나간 후 10월 17일 정신여학교 교사 사택에서는 백신영 전도사 등 16명의 여성단체 대표들이 모여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결성했다. 백 전도사는 결사부장이 되었다.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영향으로 생긴 애국부인회는 순식간에 2,000명의 회원을 확보하였고 회원들은 일제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할 것을 스스럼없이 밝혔다.

그러나 정신여학교 동료 교사의 밀고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결성 한 달 만인 11월 28일 위기가 찾아왔다. 전국적으로 임원과 회원뿐만 아니라 기부자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던 여타의 여성 독립운동가들까지 한꺼번에 체포되었다.

백신영 전도사는 대구교도소 미결감으로 호송되었는데 그곳의 열악한 상황으로 인해 중병을 얻었다. 1920년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6월부터 공판이 열려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겨우 피고석을 지켰던 그녀는 3년 구형에 결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병보석으로 풀려난 백 전도사는 강경교회에서 김복희 교사와 함께 어린이들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이끌었고, 이후 강릉, 체부동교회에서 사역을 한 후 1933년부터 10여 년간 후배 양성과 부인회 사업을 위해 일했다.    

교단의 순회부흥목사로 초교파적인 명성을 얻었던 이성봉 목사도 독립운동을 위해 노심초사했다.

결혼 후 골막염으로 고생하던 이성봉은 다리를 절단해야 될 지경까지 악화되었다. 병중에서 3.1운동을 맞은 이성봉은 아픈 몸을 이끌고 ‘대동단’이라는 독립단체에 가입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군자금을 모금하며 좁은 산중 혹은 골방에서 비밀회의를 가졌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봉의 활동이 탄로가 나서 1919년 검거되었다. 이성봉이 중병 가운데 있음을 발견한 순경은 주재소에서 집으로 돌려보내고 그를 감시만 했다. ‘대동단 사건’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던 동안에도 큰 병치레를 했던 덕에 이성봉은 5일 유치장 수감 외에는 큰 옥고를 치르지 않고 석방됐다. 이후 이성봉은 1925년부터 경성성서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전국을 누비며 복음을 전하는 부흥사로 거듭났다.

선교사들의 지도력을 이어받아 1914년 목사안수를 받고 1916년부터 경성성서학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성결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가 된 이명직은 3.1운동을 통해 민족의 문제와 고통에 함께 했음을 밝혔다.

 그는 3월 1일 조선독립운동이 일어나던 당시 분위기에 함께하여 사상가, 애국가, 지사인체 강단에 올라 군중이 원하는 말씀을 전했던 것을 고백하는 글을 남겼다.

행여 복음에 기초하지 않고 사람들이 듣기를 원하는 것으로 향하지는 않았는지 회개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목회자의 임무는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라는 본질적인 임무를 방기한 것은 아닌지 깊이 고민한 것이다.

경성성서학원 학생 등 학생들의 참여
3.1운동 당시 경성성서학원 3학년이었던 김승만은 3월 1일 당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3월 5일 남대문역 앞에서 있었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학생들이 중심이 된 남대문역 앞의 시위는 4,000~5,000명이 참여했다. 시위대는 ‘조선독립만세’라는 깃발을 들고 행진을 했는데 군인과 순경들이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군중들 사이에서 민족자결주의와 독립의 당위성을 외치며 대한문까지 진출한 시위대는 군경에 포위되어 연행되는 사람들이 생겼고 김승만도 그 때 체포됐다.

김승만은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고 죄명은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이었다. 김승만은 미결 구류 90일을 합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그후 김승만은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고 동두천교회, 인천교회, 무교정교회, 청주교회, 김천교회에서 사역했다.   

3.1운동 당시 경성성서학원 학생이었던 김응조는 3월 5일 독립선언서를 지니고 고향인 경북 영덕의 영해로 내려갔다. 그러나 집에서 대기하고 있던 형사에게 연행되었고 병곡 주재소에 연금되었다.

당시 장날에 모인 군중들이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는데 일본 대구 수비대가 출동해 많은 사상자를 내고 시위대는 체포되고 투옥되었다.

김응조는 서울에서 내려온 선동자로 지목되어 대구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김응조는 9월까지 감방에서 지내면서 취조와 재판을 받았다. 그는 4년 구형에 1년 반의 형을 받고 기결수가 되었다. 김응조는 기결수가 된지 반년만인 1920년 4월 영친왕(이은)과 방자여사의 결혼 특사로 풀려났다.

김기삼은 1918년 부산 동래복음전도관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며 1919년 3.1운동을 맞았을 때는 동래고등보통학교 3학년이었다. 3월 7일 서울에서 내려온 학생 대표가 동래고보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며 함께 참여할 것을 건의하자 김기삼을 비롯한 동래고보 학생들은 참가를 결의했다.

3월 13일 동래읍 장날에 맞추어 40여 명의 학생들이 독립만세운동을 벌이자 주변의 군중들도 만세소리로 화답했다. 그러나 기마경찰과 군인들이 나타나 시위대를 연행했고 이 때 김기삼과 함께 21명의 학생들이 검거되었다. 김기삼은 보안법 위반으로 8개월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 사실로 인해 1992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한도숙은 3월 1일 천안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18세였고 졸업을 21일 앞두고 있었다.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준비해 주도면밀하게 거사를 계획했다. 3월 20일 천안 장날에 1,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부르던 한도숙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공주교도소에 수감된 후 갖은 고문과 취조를 거쳐 재판을 받아 2년 옥고를 치렀다.  

전도부인이었던 곽진근은 당시 철원역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다가 다른 여성 6명과 함께 주동자로 체포되었다. 특히 곽진근은 군중들과 함께 친일파 박의병의 집에 가서 이완용과 그 부인이 있으면 내놓으라고 협박을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녀는 그해 내내 재판을 받게 되었고 9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소요혐의로 징역 6개월을 받았으나 공소하여 11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4개월에 10원의 과료형을 받았다. 

이상철은 3.1운동이 일어나자 경북 현풍과 고령 장날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후 상해의 임시정부 공채모집위원, 대구 달성군 교통사무지국장으로 조직적인 항일운동에 가담했다.

1920년 이두산과 함께 최급경고문, 경고문, 일본물품 불매고지서, 납세거절 포고문, 독립공채 모집에 대한 인정서, 독립청원서, ‘자유지’ 등을 계획하여 만들었고 인쇄하여 대구, 달성, 고령 등지에서 배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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