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무단통치와 성결교회의 3·1운동
지역 곳곳에서 3.1운동 이끈 성결인들

박창훈 교수
3·1운동은 민족의 독립을 선포한 민족해방운동이며, 압제와 폭압에 저항한 민주화운동이었고, 젊은이들과 여성들이 중심에서 활동한 사회운동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3·1운동은 단순히 한반도 내에서의 지역적인 운동이 아니라, 당시 세계의 변화를 인식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운동이었다.

식민정책이 시작된 초기인 1910년부터 총독부가 무단통치(무력을 내세운 강압적인 정책)를 통해 한반도에 식민체제를 구축하려는 시도는 한반도 내에서 민족자본의 형성을 가로막고,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박탈했으며,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빼앗았다.

먼저 3·1운동 때, 성결교인의 참여를 보여주는 것 가운데 최근 밝혀진 내용은 동양선교회의 대표 찰스 카우만과 경성성서학원 원장 존 토마스의 활동이다. 이들은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3·1운동을 “무저항 혁명”으로 평가하고 있다.

독립선언서의 내용을 분석하면서, 한국의 상황을 식민체제를 넘어 시민의식이 표현되었다는 역사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 특히 3·1운동을 탄압하는 일본의 만행을 미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세계에 알리고, 일본 정부에 압력을 행사할 것을 건의하였다.

곽진근은 전도부인으로 활동하던 철원에서 3·1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태극기를 만들어 만세운동을 벌였다. 일반군중과 청년들이 군청에 모여 헌병분견소까지 진출하여 만세를 불렀는데, 이 때 500여 명과 함께 무리를 인도한 사람들 가운데 곽진근이 있었다.

경성성서학원 3학년이었던 김승만은 3월 5일 남대문역 앞에서 5천여 명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는데, “조선독립만세”라는 깃발을 앞에서 들고 행진하였다. 이때 군인과 순경들이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김승만은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한국성결교회의 개척자 가운데 한 사람인 김상준의 사촌은 후에 임시정부의 요인이 되었으며, 임시정부의 법부에서 일하던 김봉준과는 6촌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김상준은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김상준은 밀양으로 내려가서 밀양교회를 개척한 강시영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모의하였다. 이로 인해 김상준과 강시영은 일본 헌병보조들에게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김응조는 3·1운동 당시 경성성서학원 학생이었다. 김응조는 연희전문, 보성전문, 이화여전, 감리교신학교와 경성성서학원 대표들과 함께 3·1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오전 8시에 남대문으로 가서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파고다 공원으로 진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 순경들이 총칼을 휘두르며 추적하자, 김응조는 3월 5일 독립선언서를 지니고, 고향인 경북 영덕의 영해로 내려갔다. 장날에 모인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외치자, 대구 수비대가 출동하여 발포하기 시작했고, 결국 많은 사상자를 내고 시위대는 체포되고 투옥되었다. 

동래복음전도관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김기삼은 동래고등보통학교 3학년 때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후에 김기삼의 부인이 된 한도숙은 3월 20일 천안 장날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어 갖은 고문과 취조를 받았다. 옥중에서 유관순 열사를 만났으며, 10여명의 여성열사들과 함께 고초를 당했다.

평남 강동군 간리에서 태어난 이성봉은 ‘대동단’이라는 독립단체에 가입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군자금을 모금하며, 비밀 결사를 하고, 좁은 산중에 혹은 골방에서 비밀회의를 갖곤 하였다. 그러나 이런 이성봉의 활동은 탄로가 나서 1919년에 검거되었다.

성결교회가 기존의 다른 교단에 비해서 인력으로나 물량에서 3·1운동에 상대적으로 적게 참여했다는 평가가 있었으나, 민족의 운명에 함께 하려던 마음은 뚜렷한 선배들의 활동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런 의미에서, 3·1운동의 거국적인 참여는 민족의 독립과 민주화에 대한 이정표를 제공한 것만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성결의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궁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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