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토마스 선교사 구타사건과 국제정치

박명수 교수
필자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1919년 3월 영국선교사 토마스 구타 사건을 당시 국제적 외교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토마스는 복음주의 선교단체인 동양선교회 선교사로서 정치와 관계없는 선교활동에 전념해 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미국선교사로 오인 받아 일본 경찰로부터 구타당했다.

주한 영국총영사 대리 로이드는 이 사건을 매우 중요하게 취급했고, 이 사건을 통해서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고, 영국시민을 보호하려고 했다. 결국 일본은 여기에 대해서 배상금을 지급하고, 사과하였다. 영국의 외교적인 승리였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시 영국과 일본이 어떤 외교관계를 갖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이 두 나라는 오래 동안 영일동맹을 맺고 있었고, 식민지를 갖고 있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영국과 일본은 같은 연합국이었다. 이런 관계 때문에 3·1운동 가운데 일본은 영국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대했다.

일본이 토마스 구타사건에 배상을 했던 것은 바로 이런 영일관계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일본의 중국진출을 매우 경계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만주를 넘어서서 산둥반도를 소유하려고 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 일본도 영국의 식민정책과 백인우월정책을 비판하였는데, 영국은 3·1운동을 통해서 일본의 통치방식과 한국인 차별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것이 영국이 토마스 구타 사건을 중요하게 취급한 이유였다.

그러면 이들과 미국과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당시 일본의 최대의 관심은 산둥반도의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워서 이것을 반대하고 있었고, 일본은 미국이 자신들의 외교정책의 반대세력이라고 생각했다.

아울러서 이런 민족자결주의가 3·1운동의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들은 미국과 미국선교사들을 싫어했고, 기독교를 박해했다. 따라서 일본은 영국인을 미국인들 보다 우대했다. 많은 미국선교사들은 일본이 영국인 토마스를 대우하는 것을 보며, 자신들은 일본에 의해서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일본은 토마스 구타 사건을 가능한대로 공권력이 아닌 민간 차원의 일로 축소하려고 했다. 하지만 영국 총영사 로이드는 이 문제의 근원이 일본 경찰의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정에 근거한 것이므로 모든 근본적인 책임이 총독부에 있다고 보았다. 결국 일본은 영국의 입장을 따르게 되었고, 여기에 대해서 사과와 함께 배상금을 물어 주게 되었다. 이것은 영국의 승리였다.

존 토마스는 동양선교회 초대 선교사로서 초기 한국성결교회를 개척한 사람이었다. 동양선교회는 복음주의적인 선교단체로서 정치적인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토착인을 사랑하고, 이들에게 리더십을 넘겨주기를 원했다.

토마스는 선교부의 토지 매입을 관찰하기 위해서 강경에 갔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서 구타를 당했다. 그는 이 사건에 수습된 다음에 다시 한국에서 활동하기를 원했지만 영국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약속 때문에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3·1운동 이후 소위 문화 통치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동양선교회는 과거 보다 대규모의 선교사를 한국에 파견하여 1920년대 상당한 부흥을 경험하였다.

토마스의 구타사건은 다른 한편으로 일본이 미국인을 어떻게 대우하는가라는 하나의 근거로서 사용되었다. 특별히 이승만은 그의 ‘일본 내막기’에서 일본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미국인들에 대해서 일본은 미국인을 영국인 보다 못하게 취급한다고 주장함으로서 반일감정을 일으켜 미국으로 하여금 일본과 싸우는 전선에 동참하도록 시도하였다. 토마스의 구타사건은 이런 방식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에 기여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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