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을 통해 드러난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원칙

3.1운동 당시 주한외국인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표명한 정교분리 원칙은 우리민족의 시각으로 바라볼 때, 반민족적 혹은 더 나아가 친일적인 행동이었는가?

한국에 파송된 주한 외국인 선교사들은 그들의 파송 교단과 신학적 성향으로 정교분리의 원칙을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이를 지키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최대관심인 내세적 신앙과 전도를 통해 교세확장에만 열을 올리지 민족의 독립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으로 보여졌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선교대상인 한국의 문제에 무관심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끌어안으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혹은 그 범위를 뛰어넘어 과감히 행동했음을 역사가 말해 준다. 

3.1운동 이전에도 주한 외국인 선교사들은 정교분리 원칙을 표명하였다. 그렇지만, 구체적인 사건인 ‘춘생문 사건’과 ‘신민회와 105인 사건’을 통해 나타난 바와 같이 그들은 한민족을 지키는데 일조하고 한민족의 부당한 처우와 상황 앞에서 적극적으로 외부세계에 목소리를 내었던 반일적 행동을 감행했었다.

3.1운동과 관련되어 드러나는 주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원칙도 마찬가지였다. 맨스필드 박사의 보고대로 모든 선교사들은 한민족에게 공감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당국과의 비밀회담에서 선교사들은 정치적인 제안들을 과감하게 그리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정교분리 원칙에 벗어나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선교사들은 정교분리 원칙을 다시 주장했다. 이유는 일제당국의 집요한 요구에 전략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선교사들이 고수했던 정교분리의 원칙은 양면적 기능으로 적용되었다.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일제당국과 비밀회담에서 드러난 것처럼, 정교분리의 원칙은 첫째, 3.1운동 개입에 대한 일제의 의심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활용되었다. 이러한 모습을 친일적이라고 말한다면 편향된 시각일 것이다.

둘째, 일제의 의도, 즉 선교사들을 이용해서 만세시위를 중단시키려는 의도에 협조하지 않기 위해 사용되었다. 당시 선교사들에게 있어 점점 더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일제총독부를 대처하는 전략은 바로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뿐이었다.

3.1운동 당시 성결교측의 주한 외국인 선교사로 있었던 영국출신 토마스는 동양선교회의 정교분리원칙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동양선교회의 본부가 있었던 미국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3.1운동의 여파로 체포된 제자들의 행방을 상세히 알고 있었을 정도로 그들의 신변에 신경을 쓰고 마음을 쏟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그는 강경에 전도관 신축을 위해 내려가다가 일제 경찰에 의해 심하게 구타당했다. 뜻하지 않는 봉변과 구금으로 토마스 선교사는 한민족의 아픔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일제는 토마스 선교사에게 어떤 잘못도 찾지 못하자, 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민간인이 폭행한 것으로 왜곡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토마스 선교사는 일제의 위협 앞에서 끝까지 사인을 거부하며 버텼다. 그리고 당시 조선을 방문 중인 맨스필드 박사에게 일제의 만행을 본국에 알리도록 비밀리에 부탁하였다. 맨스필드 박사가 러시아로 돌아간 후에 미국에 보낸 편지의 내용에 보면,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보고하였다.

또한 그는 토마스 선교사의 편지도 그대로 묶어서 보냈는데, 이 문서에 토마스 선교사는 성서학교가 정치적인 사건으로 문을 닫게 되었고, 폐교된 사실을 짤막하게 보고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은 토마스 선교사가 일제당국에 들키지 않고 비밀로 조선상황에 대해 미국에 알리고자 했던 노력이었다.

편지를 받은 동양선교회 대표 카우만은 공식적으로는 정교분리의 기조를 유지하였지만, 동양선교회 소속 주한 선교사들의 보고 내용을 미국에 알려 미국정부가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토마스 선교사의 구타사건의 결말은 영국당국과 일제당국의 타협으로 일단락을 맺게 되었다. 일제의 보상과 토마스 선교사의 조선입국금지라는 타협이었다.

토마스 선교사는 정교분리 원칙을 유지하면서 한국선교의 의지를 끝까지 관철하려했지만, 영국당국과 일제당국은 정교분리 원칙을 깨고 종교적 영역까지 개입해 결국 토마스 선교사로 하여금 한국을 떠나게 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것은 공권력의 개입으로 정교분리 원칙이 무너져 발생한 결과를 보여준다.

3.1운동 당시 주한 선교사들의 종교분리의 원칙이 정말로 반민족적인 행동인가? 기독교의 종교분리 원칙은 정말로 개인 도덕영역으로 기독교의 정의를 축소시켰는가? 균형 잡힌 판단을 위해 주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정교분리의 원칙을 다각도로 판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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