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7:13~14, 16:24)

조창인의 소설 ‘길’을 읽으면서 소설의 주인공인 승우와 날치를 통해서 삶의 가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소설에서는 13살 승우를 통해서 삼촌 날치가 변화되는 모습과 승우의 가슴 아픈 여정의 삶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가치있는 삶이란 무엇인지를 곰곰이 되묻게 되었습니다.

오래 전 목사안수를 받고서 가까운 친인척 몇 분과 이야기 하던 중 “목사이기 전에 성도다워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어느 분이 “이제 목사인데”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이제는 성도를 뛰어 넘어 훌륭한 목사가 되라는 의미일 겁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목사이기 전에 먼저 온전한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때때로 목사인 나보다 더 훌륭한 성도들을 보며 감탄합니다. 목사와 성도는 직분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점은 예수님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을 빼버리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왜 예수님을 선택하여 믿고 사는지, 왜 예수님이 가치의 중심인지, 왜 예수님이 삶의 모든 것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각자 여러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살기 위해 예수님이 필요했습니다. 흔한 간증 중 하나인 병든 몸이 나아서 살아야 했기에 예수님이 필요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어떤 이유에서든지 예수님이 필요해서 예수님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는 은혜 받았다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면서 받은 은혜가 많아 그것이 자랑이 되고, 간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깊은 사랑에 젖어 들고 나니 예수님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저 예수님이 좋고 그와 함께함이 좋습니다. 때로는 내세우고 자랑할 것 없을 지라도 그저 그분의 이름을 부름이 좋고 예수님 이름 한 번에 웃음이 절로 납니다.

생각해 보면 목사와 성도의 길은 그 이름을 부르면서 자족하며 가는 길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살아가는 모습과 맡은 직책은 다를지라도 그 이름 앞에서는 모두가 같은 길을 가는 동무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짊어져서는 안 되는 세속적인 짐들을 다시 잔뜩 어깨에 메고서 그것을 죽어라 움켜쥐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지도 않고 가치없는 일인데도 그걸 움켜쥐고 있는 나를 봅니다. .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 앞에 다 내려놔야 되는데”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이 짐이 우리가 가야할 목사의 길을, 성도의 길을 못 가게 하는 것이기에 내려놓고 주님의 멍에만 남겨놔야 되는데 무엇이 그것을 못 내려놓게 하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고는 합니다.

하늘을 바라보다 나는 지금 ‘목사의 길, 성도의 길’을 제대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 맞는지 두 눈을 감아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을 할 수 있음에 기쁨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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