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우 목사
인생은 답을 찾는 긴 여정입니다. 그 답을 찾기까지 늘 목마른 사슴처럼 허겁지겁 살아갑니다. 어느 순간 답을 찾은 것 같았으나 이내 실망하고 맙니다. 마치 물이 손아귀에 잡히지 않고 빠져나가듯이 사라지고 맙니다. 따스한 봄볕에 눈 녹듯이 허무하게 사라지고 맙니다. 답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직 길을 찾지 못한 나그네처럼 방황하는 인생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죽음에 대한 답입니다
인간의 변함없는 여전한 질문은 이 생명이 어디에서 온 것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의 문제입니다. 지금 여기에 내가 존재하는 것은 이미 생명이 주어진 것인데 이것은 영원하지 않기에 사라져 갈 것입니다. 사라져 가는 것, 곧 죽음에 대한 답을 아직 구하지 못한 채 이럭저럭 살아갑니다. 살아있으니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봐 늘 불안합니다.

여기, 한 젊은이가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아마 지병과 싸우다 의약의 도움도 무용하여 최후를 맞고 말았습니다. 죽음을 맞이한 당사자보다 그를 생명처럼 사랑하고 따랐던 두 누이는 우리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극한 슬픔에 잠겼습니다. 고인과의 아름다운 기억들이 더 큰 슬픔이 됩니다. 죽음은 살며 사랑하며 행복하고 싶은 우리의 답이 아닙니다.

누이들은 혹시 모를 죽음의 사자를 맞이하기 전에 수많은 병든 자를 일으키시고, 자기들을 극진히 사랑하시던 예수님께서 오셔서 오라버니를 구해달라고 통지를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한 발 늦게 그 분이 오셨습니다. 어쩌면 야속한 마음에 더 큰 슬픔으로 울부짖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이 때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하시며 위로합니다. 그러나 두 누이는 동일한 아쉬움을 털어 놓습니다.

이를 바라보시며 예수님은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결국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이 눈물은 친구를 잃은 애석함만은 아니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모든 인간의 비극을 바라보시며 흘리신 구원자의 연민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슬픈 상황에 놓인 그들에게 근원적인 답을 주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이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자신을 가리켜 죽음에 대한 답으로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시편기자는 이미 고백한 바 있습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시 16:11)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시 36:9)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골 3:4)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롬 5:17)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바 있는 D. 함마슐드는 “죽음을 찾지 말라. 죽음이 당신을 찾을 것이다. 죽음을 완성으로 만드는 길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길을 찾았습니까?

거짓에 대한 답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피곤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 중에 한 가지는 사이비가 극성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거짓뉴스가 난무하고 극단적인 좌나 우에 치우쳐 한 쪽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불확실성의 미래 앞에 청춘도 길을 찾지 못하고 전전긍긍 합니다. 성실히 일한 자의 땀과 눈물이 통하지 않습니다. 진실보다 재미를 유발시키는 불편한 진실에 더 귀를 기울이며 혼란에 빠집니다. 너무나 뻔한 거짓을 끝까지 은폐하려고 합니다.

방황에 대한 답입니다
유사성 진리가 진리를 오도합니다. 그릇된 길로 이끕니다. 가상세계를 매일 밥 먹듯이 들락거리는 세대에게 어찌 혼란이 없겠습니까?

4차 산업혁명의 미래를 눈앞에 맞이하면서 아직 준비되지 않은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 무리에게 방황은 필수코스와 같습니다. 이런 현실을 살아가기에 사람들은 방황합니다. 어디가 진리로 가는 길인지 찾지를 못해서 방황합니다.

인간은 미완성의 생명입니다. 탄생의 순간부터 만들어져가는 존재입니다. 생명에 대한 자각조차 없이 주어진 그대로 그냥 살아가기도 합니다. 거짓에 속으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대적 사탄의 술수임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그렇게 흘러갑니다. 생명의 완성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방황하는 인생의 길이며, 거짓의 옷을 벗어버리게 할 진리요, 영원한 완성된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되심을 공포하시며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빌라도가 예수님께 길을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 모든 방황하는 영혼들의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빌라도에게 답하셨습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 18:37)

유사성 행복과 유사성 생명을 찾다가 마약사범으로 미투 의혹자로 법정에 서는 자들을 봅니다. 왜 그 길로 갔을까요? 반반하게 생긴 유명인들이 말입니다. 유사성 목자도 있습니다. 자기 욕심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남발합니다.

우리는 매일 죽음과 부활을 연습합니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내 영혼을 주의 손에 맡기는 기도를 드립니다. 잠든 사이에 어떤 일을 만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아침을 맞이하며 잠에서 깰 때 새로운 생명의 시간을 맞습니다. 다시 태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부활은 전혀 다른 제3의 생명체로 부활할 것입니다. 단지 살아있을 때에도 얼마든지 죽음을 예견할 수 있으며 부활의 순간을 간접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답입니다
세월호 사건으로 우리 국민 모두가 집단적인 죽음 트라우마를 겪고 있습니다.
조금 멀리 떨어진 제주도의 사람들은 4.3사건으로 죽음과 차별에 대한 트라우마를 지금도 상당히 겪고 있다고 합니다. 누가 우리를 이 죽음과 거짓과 방황에서 구하여 낼 수 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답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일 2:25)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