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청년 7인 모여 ‘성우청년회’로 시작
초기에 5개 교회도 세워
교단 해산 후 1949년 ‘성결교회 청년회전국연합회’ 창립
한국교회 최초 ‘청년주일’ 제정
금식성회 등 활발한 사역 이어가

성결교회 청년회전국연합회(이하 성청)가 어느덧 70주년을 맞이했다.
성청은 외국에서 유래된 장로교의 ‘면려회’, 감리교회 ‘청년회’와 달리 우리교단 청년들이 세운 조직이라는 점에서 우리교단의 자랑이다. 청년들의 뜨거운 기도와 전도열정으로 초기 성결교회 성장에 큰 기여를 한 성청, 그 70년 역사의 발자취를 되돌아보자.

청년 스스로 ‘성우청년회’ 조직
성청의 모체인 성우청년회는 1934년, 금천 남산교회 청년 7인이 모여 신앙 향상과 전도를 위해 만들어졌다. 이들은 매주일 밤 기도운동을 벌여 회개운동을 일으켰고, 전도에도 앞장서 김천 일대에 다수동교회 등 5개 교회를 세웠다. 이 같은 활동은 ‘활천’에 보도돼 전국 각 지교회의 청년회 조직에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1943년 12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교단이 강제해산 되면서 성우청년회도 함께 사라지고 해방 후에야 청년운동가 윤판석 장로를 중심으로 ‘성결교회 청년회전국연합회’가 구성됐다. 성결교회 청년들은 1949년 4월 16일 성결교회 청년회전국연합회 창립총회를 열고 다시 힘찬 걸음을 내디뎠다.

같은 해 교단 제28회 총회에서는 매년 3월 첫 주일을 ‘성청주일’로 지키기로 해 한국교회 최초의 ‘청년주일’ 제정이 이뤄졌다. 총회 이후에는 ‘성청회보’를 발간했고 ‘제1회 성청 전국대회’를 열었다.

6.25전쟁 때도 청년활동 재건 도와
6.25전쟁 중에도 성청의 활동은 중단되지 않았다. 1953년 1월 12일, 전국을 3개 권역으로 나눠 ‘지방순회’를 실시해 전쟁피해를 입은 교회당을 돌아보고 청년 활동 재건을 도왔다. 지방회 실정의 파악으로 청년회의 조직 강화 및 부흥의 불길을 일으키는 역할을 했다.

1959년에는 성청의 초기 운동과정을 담은 ‘성청사’를 발간했다. 성우청년회부터 당시의 상황까지 역사를 모은 성청사는 나열된 자료의 보고에만 머물러 시대에 대한 평가가 없다는 점이 아쉬웠지만 이듬해에 재판을 발행할 만큼 성결인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1960년대에는 성결교단이 기독교대한성결교회와 예수교대한성결교회로 분열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 때도 성청의 역동성은 잠잠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 활동보다 더 넓은 범위로 활동을 확대해 연합기관인 ‘한국기독교청년회협의회(K.C.Y.C)에 실행위원, 총대 등을 파송하며 주도적인 일을 담당했다.

1963년 7월 1~7일 ‘성청 특별 기도주간’을 실시해 청년들의 신앙회복과 사명을 고취시켰고 빈민노동자 구호 및 전도로 한국사회에 희망의 손길도 뻗었다.

신년금식대성회로 성청 부흥기 맞아
1970년대 성청의 활약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제1회 성청신년금식대성회’다. 1977년 1월 2~3일 1박 2일간 열린 성회에서는 지역 복음화를 위한 전도실습도 진행돼 결신자 59명의 열매를 맺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많은 인원이 모였고 성청신년금식대성회는 현재까지 성청의 대표적인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또 문화적 열정으로 가지고 다양한 사역도 추진했다. 1977년 1월에는 청년 100여 명이 모여 ‘연합 성가단’을 창립해 그해 부활절에 신촌교회에서 연합연주회를 열었다. 이어 ‘방송 선교’를 시작했고 6월 27일부터는 CBS기독교방송에서 매주 청소년을 위한 방송을 진행했다.

1980년대에는 5개 지련으로 출범했던 성청 조직이 21개 지련으로 늘어 ‘성청지도자연수회’도 개최했다. 또 당시 독특했던 사업 중 하나는 ‘성청 선교수첩’ 제작이다. 일반적으로 회사나 학교 등의 조직체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청년회 차원에서 이를 제작해 회원들과 나눈 것은 청년들이 성청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1984년 11월 12일, ‘성청 39년사’도 발간해 성청사의 사료, 주요사업들에 대한 소개, 기사 스크랩, 임원 명단 등을 정리했다. 1987~1988년에는 서울신대 학생회 및 각 교단 청년연합회,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등과 연대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반 통일교 운동’ 등도 벌이며 활동범위를 크게 넓혔다.

폭넓은 활동으로 기독청년 위상 높여
1990년대에 성청은 내실을 다졌다. 금식성회, 전국대회, 지도자연수회 등 기존사업을 꾸준히 이어갔고 성청 지도급 인사들의 모임인 청년동우회가 발족됐다. 이후 충북 제원군에서 농촌봉사활동도 실시하는 등 농민들의 어려움에 동참하며 기독청년의 위상을 높였다.

1994년 8월 4~6일에는 ‘94국토사랑 자연사랑 성청인 등반대회’를 개최해 건강한 정신으로 희년을 맞이하려는 시도를 했다. 1997년에는 예성 청년회전국연합회와 함께 제21회, 22회 성청신년금식대성회와 임역원 수련회를 함께 열었다. 50주년을 맞은 1999년에는 ‘성청 50주년사’를 발간했다.

2000년대에는 세계성결연맹 청년대회를 주도하며 대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2006년 우리나라와 일본, 대만 등 5개 국가 청년들이 모여 세계성결연맹 제1회 청년대회를 열었고 우리교단은 2008년 8월 11~15일 필리핀에서 열린 ‘제2회 청년대회’를 주관했다. 2009년에는 성청 활성화를 위한 공모사업도 진행해 경남서지방, 경북서지방, 충북지방, 충서지방 등에 행사 지원금을 전달했다.

이 밖에도 성청은 지방회 별로 결혼예비학교, 성청·청소년 연합성회, 문화콘서트, 찬양의 밤 등 활발한 사역을 펼쳤다. 특히 올해는 70주년을 맞아 신길교회에서 기념대회를 개최했다.

영광의 지난 날에 비해 현재는 규모와 사역이 크게 줄어 아쉬움이 남는다. 현재 54개 지방회 중 성청이 조직된 곳은 20곳에 머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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