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중 재정 시련에 처한 부산교회의 사역

홍순균 목사는 부산교회로 전임하였다. 총회장을 역임한 분으로 대전의 큰 교회를 그만 두고 부산의 건축을 중단한 작은 교회로 떠났을 때 많은 목사들이 떠날 수밖에 없는 무슨 이유라도 있었는지, 의아해 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교회 역시 교회건축을 중단한 어려운 교회였기에 그가 초심을 따라 결정한 것이다.

부산교회는 본래 초량교회에서 나온 교회인데, 초량교회의 목사가 예성을 고집하는 바람에 그 교회 모태신자인 김재철 장로와 신영희 장로를 중심한 지지자들이 따로 나와 우리 교단의 부산교회를 세웠다. 어느 목사를 모시고 부흥되다가 무리하게 교회당을 건축했는데, 재정문제로 공사를 중단하고 목사도 떠나고 신자들도 자꾸 떠나게 되어, 교회가 큰 위기를 만났다.

어느 날, 그가 부산에서 목회할 때 친분이 있는 김재철 장로가 대전에 와서 홍 목사를 만나 상담을 했다. 교회의 어려운 형편을 얘기하면서 김 장로가 자기 교회에 적당한 목사를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갔다. 그래서 그가 적당한 목사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그가 처음 헌신할 때 교회건축을 필요로 하는 교회가 청빙하면 무조건 가겠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는 오랫동안 기도하다 마침내 그가 자원해서 가기로 하고, 대전중앙교회에 사표를 내고 내려갔다. 누구도 쉽지 않은 십자가를 지는 삶을 또 선택한 것이다. 홍 목사는 가는 곳마다 교회건축을 했는데, 목회의 마지막 교회도 결국 교회 건축을 중단한 부산교회였다.

부산교회에 갈 때는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지만,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신다는 확신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크게 걱정은 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 가며 건축을 추진했다. 교회 부채의 이자나 상환문제로 고통이 많았는데, 목회 40년 동안 고생도 많이 했으나 60대라는 나이 때문인지 부산교회에서 받은 고통이 가장 힘들고 어려웠다.

홍 목사는 3년만에 헌당하므로 그의 5번째 교회건축을 완료한 후, 부산교회에서 10년 간 목회를 끝으로 정년 은퇴하고 1992년 11월에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신학교 졸업한지 만 42년 만에 은퇴한 것이다. 돌아보니,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셨고, 이끄신 은혜로운 삶이었다.

마지막 봉사는 부산신학교 초대 교장과 기관지 활천사 초대 사장
그는 교회목회 외에도 교역자양성원인 부산신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10년 동안 있으면서 해마다 20명씩 졸업시켜 그의 재임 중 약 120명의 교역자들을 양성했다. 특히 신학교에서 그의 목회철학인 농심목회(農心牧會)를 연구하여 교재로 만들어 가르친 것이 유명하다.

또한 교단기관지 ‘활천’의 사장으로 은퇴할 때까지 2년 간 봉사했다. 1992년 활천이 총회 결의로 독립운영하게 되었을 때 그는 초대 사장으로 선임되어 기틀을 굳게 다졌다. 그가 재임 중 사시를 정했는데, ‘사중복음의 신학화’, ‘사중복음의 문화화’, ‘사중복음의 생활화’였다.

그는 평소 도전의식이 강해서 좋은 것은 서슴없이 배우고 활용했다. 그는 50대에 서예, 60대에 컴퓨터, 67세에 운전면허 획득, 은퇴 후에는 일본의 유명한 기독교지도자 우찌무라 간조, 나까다 주지 등의 글을 번역해서 활천에 게재했으며 98세로 장수하시다가 2017년 11월 28일, 하나님께 부르심 받아 하늘나라로 가신 필자가 가장 본 받고 싶은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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