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에서 하숙을 하고 있던 소년에게 6.25는 힘든 세월이었다. 반은 굶다시피 했던 한 달을 채운 7월 말에야 서울을 떠나 고향을 향하기까지는 많은 주저와 용기가 필요했다. 길은 험했다. 그러나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요, 자랑이었다. 무용담을 털어놓을 틈도 없이 다시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소년은 간직했던 많은 이야기들을 삼가야 했다 그것은 ‘진택이와 밧데리’라는 너무나 빛나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이상범, ‘나의 6.25’)

▨… 이상범의 친구 진택이는 포항읍의 농구 스타였다. 훤칠한 키의 소년에게 밧데리라는 별명의 애인이 생겼다. 낙동강전선이 무너지는 상황이 벌어지자 학생모 위에 수건을 질끈 동여맨 소년들은 시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출발했다. 학도병, 그중에 진택이가 있었다. 트럭이 움직이자 세라복의 두 가닥 머리 소녀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진택아!” 그리고 소녀는 쓰러졌다. 진택이의 전사 소식이 전해진 것은 그로부터 한 달도 채 못 되어서였다.

▨… ‘달빛을 머금은 전설’ 같은 이 이야기 때문에 이상범은 서울에서 포항까지의 고난의 길을 무용담으로 풀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6.25발발 69주년, 6.25를 체험한 한국인이라면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겪지 않은 사람이 드물 것이다. 작가 하근찬은 ‘수난2대’에서 일제의 징용에서 팔뚝을 잃은 아버지와 6.25의 전란에서 다리를 잃은 아들의 모습을 “이기 무슨 꼴이고, 이기”라는 외마디 비명으로 증언했다.

▨… 6.25전란의 체험자들이 역사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다. 민족분단의 비극은 아직 현실로 남아 있음에도 동족상잔의 무자비는 역사의 기록으로만 보존하려 하고 있다. 용서할 수도 받을수도 없는 것으로… 분단의 원인을 일제와 외세의 탓으로만 돌리는데 익숙해져 있는 우리는 북핵문제도 외세가 해결해줄 것이라는 환상에만 머물려고 하고 있다.

▨… 우리교단의 몇몇 선각자들이 북한선교위원회를 조직하고 민족분단의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고자 노력하고 있다. 민족분단의 현실은 정치권의 문제로만 미루고자 했던 우리교단의 몰염치를 부정할 수 없기에 북선위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자 한다. 북선위가 앞장서면 남과 북의 6.25 상흔을 치유할 수 있는, 그 치유를 통해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새 지평이 열릴 수 있을까.  6.25 69주년에 성결인의 기도를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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