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는 작은교회를 부른다

“큰 교회를 들를 기회는 많았어요. 수기들을 읽으며 많이 자책했네요. 그간 작은 교회들을 좀 더 살피지 못한 점이 부끄럽고, 미안했습니다.”

이번 ‘작은교회 목회자 수기 공모전’을 주관한 한국성결신문의 담당자가 내비친 마음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심사하는 이들 모두의 마음이기도 했다. 필자 또한 작은교회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니, 더욱이 어린이중심 교회를 세워보겠다고 수년간 발버둥친 사람이니, 무릎걸음으로 버텨온 응모수기들을 심사라는 이름으로 재껴야하는 아픔이 유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또 있었다. 응모수기 군데군데에서 묻어나는 소외감, 열등감, 상실감 등 트라우마성 증상들이었다. 그런 수기를 만날 때마다 ‘얼마나 힘 들었으면’ 하며 저린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커야만 교회이고, 수가 많고 재정이 넉넉해야만 ‘목회성공’이겠는가. 소위 그런 성공이 지탄꺼리가 되고, 교회 모두를 부끄럽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 것을….

우리가 흔히 쓰는 용어 ‘미자립교회’는 ‘미성숙-미완성’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작은교회’ 또한 ‘교회’이다. 그저 규모가 작을 뿐이다. 따라서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야 하는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고, 교회가 교회답지 못함이 부끄러운 일이다. 더욱이 농어촌교회의 취약성은 인구의 도시집중현상이 빚어낸 것이고, 그러므로 도시교회가 품어 마땅할 지체가 아닌가. 

차제에 우리 한국성결신문의 ‘작은교회 수기 공모전’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공모전의 취지는 이러했다. ①작은교회 목회자의 사명과 자부심을 심어준다. ②작은교회 목회사역의 활력을 높인다. ③작은교회에 희망과 비전을 제시한다. ④작은교회의 특성화목회를 활성화한다. ⑤작은교회의 어려운 현실을 알리고, 작은교회에 대한 관심을 높인다.

덧붙여 ‘작지만 진정성을 가지고 사명을 찾아가는 모습’을 높이 사겠다는 심사기준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니 작은교회를 큰 교회가 되어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여기는 교회관은 애초부터 열외로 삼는 공모전이었던 셈이다.

맞다. 작은교회가 필요하다. 시대는 작은교회를 부른다. 서로를 알고 마주하며 뜻을 모으는 교회, 나름 전문화된 가치를 추구하는 교회, 그런 작은 공동체를 시대가 요구한다. 거기에 부응하듯 교회의 보편성을 유지하면서도 지역과 상황에 적응하여 특화된 교회들이 세워지고 있지 않은가. 처음 시작은 카페교회 정도였다. 요즘은 어린이, 노인, 도서관과 독서, 음악과 찬양, 나아가 다문화가정을 품거나 ‘일진’이라고 일컫는 청소년들을 품는 교회도 있다.

응모수기 중에는 귀농인 목회자가 있었다. 그는 마을의 간사가 되어 마을신문을 만드는 한편 마을의 어르신과 어린이들을 위한 사역을 개발했고, 6년이 지난 후에야 교회설립예배를 드렸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교회가 세워지기에 앞서 철저히 마을사람이 되었고, 마을구석구석을 살피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어가는 모습의 교회를 일구고 있었다.    

사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교회의 크기 겨루기는 없었다. ‘부흥은 곧 성장’이란 등식 또한 없었고, ‘부흥’하면 ‘심령부흥’이란 개념이 일반적이었다. 교회가 목적인 듯 싶은 꼴은 아무래도 1970년대 맥가브란(D. MaGavran)의 교회성장학이 들어 온 후부터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게 ‘끝없는 사다리를 올라가기에만 급급한 한국인의 심성(李奎泰)’에 딱 맞아 떨어졌고,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지 싶다.     

말미에 붙이고 싶은 한 마디, 공모전의 특성상 ‘교회-신앙-헌신’을 우선에 두었다. 그러나 글은 읽어줄 때 가치가 있게 마련이다. 문장의 구성이나 표현이 좀 더 문학적으로 다듬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교단총회에, 작은교회를 위한 적정[accord목회]처방연구소와 목회자상담실 운영을 제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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