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청년 박정배

주님의 은혜로 병 고침을 받고 나니 신앙은 나날이 성장했다. 이젠 건장한 청년으로 교회의 모든 일에 앞장서서 일했다. 어떤 일을 하던지 재미가 있었고 기쁨이 넘쳐났다. 성도들은 병을 고치고 귀신이 나가는 기적을 보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김창순 여전도사님도 정배 청년이 깨끗이 치료되고 큰 일꾼이 되는 것을 보고 아주 기뻐했는데, 그 후 하저리 뿐 아니라 율암리에서도 총각 처녀들이 교회로 몰려왔다. 청년들이 많이 몰려드니 교회는 생기가 넘쳐났고, 박정배를 중심으로 청년들의 힘으로 교회를 건축했다. 

그러나 정배는 하나님을 위해 살기 위해서 공부만큼은 계속해야 했기에 수원에 있는 고려 영수학원을 다니면서 수료했고, 또한 고등성경학원을 졸업했다.

어느 여름 날 비가 억수같이 퍼부어 둑이 무너지면서 그의 집에서 심어놓은 벼를 모래가 밀고 들어와 차근차근 덮었다. 아들의 병을 고쳐주신 것을 보고 모든 미신을 버리고 아들 따라 교회 나오시던 부모님은 그날만은 “우선 모래를 걷어 논일을 하고 다음에 교회를 가거라. 오늘 모래 못 걷으면 일 년 농사 망친다.” 고 분부했다.

그러나 정배는 일 년 농사를 망친다 해도 주일을 범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교회로 가고 안 보이니 “정신 나간 놈, 당장에 손을 써야 할 논일은 안중에도 없고 농사를 망쳐놓고 교회부터 가?” 아버지는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주일 오후에도 오지 않고 월요일 새벽기도회까지 마치고 돌아온 아들을 보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혼내주려고 작대기를 들고 기다리고 서 있었다. 아버지가 서슬 퍼렇게 벼르고 작대기를 휘두르고 서있는 모습을 보고 그는 갔다가는 매 맞아 죽을 것만 같아 그길로 도망쳐 산으로 올라가 솔뿌리를 붙잡고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다. 산 기도는 그 날로부터 시작되어 성령의 불을 받아 전도하며 아버지의 핍박을 이겨내고 교회에 더 열심을 내었다.

6.25가 발발하고 남한이 전쟁터로 변해버려 모두들 피난길에 오르고 너나 할 것 없이 어려운 시절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먼 길 걸어서 교회를 다닌다 해도 교회에서 밥을 해 준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도시락을 지참하고 예배에 빠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던 중 군 입대영장이 나왔다. 국가의 부름을 받았으니 거부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내 인생을 바꿔주신 주님, 죄 없으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내 죄를 대신해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어 나를 구원해 주심을 확실히 믿고 있었기에 군대에 가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신앙만은 꼭 지키리라”고 굳게 다짐했다. 

그는 해병대로 배치를 받았다. 워낙 신앙심이 투철하고 명석하고 민첩했기에 전령으로 뽑혔다. 남한은 전쟁이 끝났다고는 하지만 북한에서 간첩이 자주 넘어오므로 긴장을 풀 수는 없는 상태다. 그러기에 전령은 언제든지 실탄을 장착하여 권총을 차고 다녔다. 당시 현역 군인이라면 외출은 엄두도 못 냈지만 전령은 외출이 좀 자유로웠다.

외출 나오면 아버지는 아직도 전운이 감돌고 국가는 어수선한데 어찌되었던 결혼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내가 죽기 전에 며느리 손에 밥이라도 얻어먹고 죽어야 한다.”고 하시더니 결혼하기가 어려우면 약혼만이라도 해야 한다. “내가 봐둔 규수가 있으니 그 규수가 다른데로 시집가기 전 약혼을 해두어야 맘이 놓이겠다고 서두르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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