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호 교수
폴란드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바우만(Zygmunt Bauman)은 “대상이 불분명할 때, 위치가 불확정할 때, 형태가 불확실할 때, 포착이 불가능할 때, 이리저리 유동하며 종적도 원인도 불가해할 때 인간의 공포가 극대화된다”고 말하면서, 확실성과 안정성, 보안성을 상실한 현대사회가 그와 같은 공포를 주요 특징으로 지닌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공포가 지배하는 현대사회는 자본주의 및 신자유주의를 통한 전통적 규범의 해체, 끊임없는 경쟁의 가속화, 공동체를 향한 충성과 헌신의 상실, 성공을 위한 자기 계발과 자기만족주의(Narcissism) 만연 등의 현상을 보인 후 종국에는 번영과 성과중심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로 귀결된다. 그리고 통제와 예측이 어려운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공동체적 울타리와 거대 서사를 상실한 채, 각자 개인이 공포를 극복해야 하는 단절과 분리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공포사회의 실상을 체감하기 어렵다면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 오랫동안 작동을 멈추었던 국회, 대학교 재킷에 특정 고등학교 이름을 새기며 자신들만의 리그를 형성하는 학생들, 끝없는 잡음의 연속인 기독교 연합단체 등을 연상하라고 권하고 싶다. 규모와 양상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저들 대부분이 공동체 정신과 윤리의식의 부재 속에 오직 번영과 성공만이 절대 기준임을 보여주는 생생한 실제 예들인 까닭이다. 이런 모습들 저변에는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경쟁의식과 개인의 번영만을 소원하는 탐심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공포와 불안으로 얼룩진 무의식이 은폐되어 있다. 요즘 유행하는 전지적 시점이라는 용어도 실상 자기 외에 다른 누구의 의견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오만과 편견의 발로인 동시에 숨겨진 공포와 불안을 반영한다. 이런 심리적 상태와 사회적 증상이 반복되면 사람은 철저히 개인으로만 남게 되며, 해결할 수 없는 공포와 불안은 끝없는 증오와 적개심으로 표출되는 수순을 밟는다.

모종교였던 유대교의 한계를 극복한 기독교는 이런 공포와 불안에 과감히 도전하면서, 이기주의와 번영 지상주의에 경종을 울렸던 신흥종교였다. 배타적 속성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한 가부장적 율법과 계명 대신 희생을 강조하는 진리와 사랑의 복음을 전면에 내세운 반면, 출발점을 타인이 아닌 자기희생적 포기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상대적 우월감을 강화하기 위한 선 긋기를 선호했던 당시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은 자신의 고유 권한을 포기하면서까지 공포사회의 편견에 맞섰고, 수치와 오욕을 상징하던 십자가는 그런 저항적 가르침의 핵심 기호로 선택됐다.

이처럼 공포와 불안을 넘어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점차 개인의 안녕과 사회 부조리 개선은 물론 인권을 유린당하고 차별을 강요당한 이들에게 희망의 토대를 제공했다.

그랬던 기독교 신앙이 공포사회의 원인으로 작용하며 번영과 성공의 도구, 혐오와 미움의 수단으로 추락했다.

능치 못한 일이 없다는 믿음의 가치는 도깨비 방망이나 알라딘 램프처럼 소원을 들어주는 자동판매기로 전락했고, ‘연합’과 ‘애국’을 기치로 내건 기독교 단체들은 단절과 분열을 주도하며 교회를 공포와 불안의 주체로 변질시켰다.

치유와 회복이라는 기독교 본연의 사명은 어벤져스 같은 슈퍼 히어로들에게 전환되는 코미디가 일어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이 적그리스도와 유사해지는 황당한 비극 역시 자주 발생하고 있다.

교회는 이런 현실을 뼈저리게 반성하며 모든 선택에 예수님의 복음과 삶을 최우선 순위로 적용하고 희망과 평화를 다시 노래해야 한다.

예수님은 정치적 진영논리 및 경제적 탐욕과 결탁한 선동구호나 두려움과 염려 앞에 굴복당하는 나약함의 상징이 아닌 탓이다. 그런 차원에서, 준엄한 마태복음 7:23절의 표현은 공포사회와 왜곡된 기독교 신앙을 향한 역설적 선언으로 수용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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