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민주주의와 사람을 사랑하신 분”

김종두 목사
목사님! 제가 작년 설날에 찾아뵙고 방을 나서기 전에 축복기도를 청했었지요. 그 때 족장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듯, 임종을 앞둔 야곱이 그 아들들을 축복하듯 간절하게 기도해주시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한번쯤 더 찾아 뵐 기회가 있으리라 여겼는데 이렇게 훌쩍 우리 곁을 떠나셨군요. 모든 인간관계에 늘 솔직하고 담백하셔서 평소 어떠한 집착도 회한도 남기지 않으시던 참으로 류연창 목사님다운 마무리입니다.

하지만 그날 뵈었던 목사님은 비록 거동이 자유롭지 못했지만 얼굴이 평소처럼 맑았고 마음도 평소처럼 한결같으셨기에 저는 목사님의 임종이 언제 건 지극한 평안 속에 이루어 질 것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가슴이 메이는 것은 여전히 이별이 아쉽고 애달픈 때문입니다. 지난 설날 제 앞에서 사모님이 목사님의 침대 높이를 조정하면서 “말 잘 안 들으시면 요양병원에 갖다 버릴 것”이라고 하여 함께 웃었지요. 사모님은 1년 6개월이 넘는 시간 목사님 곁에서 한결같이 손발이 되어 병수발하셨음에도 딱 한순간 방심으로 목사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면서 저렇게 애달파하십니다.

그러면서도 목사님을 “아들 하나 먼저 보낸 것 외에는 흠결이 없는 양반이고 평생 자기 하고싶은 걸 다해보고 가신 행복한 양반”이라고 하십니다. 그 양반 행복하도록 평생 자기 힘들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아들 집사님은 아버지의 부음을 내면서 “평생 민주주의와 사람을 사랑하신 분”이라고 아버지께 대한 존경을 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목사님의 임종은 한 시대가 저무는 변곡점입니다. 목사님은 봉산성결교회 원로목사를 넘어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시대적 양심이셨고 대구기독교회의 인권과 민주주의의 상징이셨습니다. 목사님은 연출된 이미지의 그림자 뒤에 숨어 실상은 온갖 명리에만 밝은 소위 이 시대 기독교의 평균적 지도자들과는 애초 격이 다른 시대의 큰 나무였습니다.

목사님은 먼저 간 아들 동운이를 “병든 역사를 살리기 위해 그 역사에 묻힌 한 알의 밀알”이라고 해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무덤이 아니라 자신의 가슴 속에 묻는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가슴이 아들의 진정한 무덤”이라는 아버지를 우리는 일상의 문법으로는 해명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체험의 레포우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것은 목사님 만의 십자가였습니다.

목사님은 남은 아들 동인이를 위한 법정 증언에서도 동일한 잠언으로 냉혹하고 눈 먼 당시의 법정을 질타하셨습니다. 목사님은 결국 인간 운명이건 역사의 길이건 불의하고 폭압적인 국가 폭력에 맞선 인간 자유와 정의의 길은 오직 사랑에서 화해되고 완성된다고 선언하셨고 자신이 짊어진 그 희생을 사랑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이 땅에서 목사님의 얼굴과 형체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 시간 저는 목사님과 함께 나눈 기억들이 너무 생생해 집니다. 1987년 5월과 6월 최루탄 가스 가득한 중앙로를 앞장서 걸으시던 목사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민통련 관계로 끊임없이 감시당하고 억압당하시면서도 언제나 당당하던 목사님의 모습도 보입니다. 언젠가  봉산교회 부목 출신 박원기 목사, 김선일 목사와 함께 목사님을 식탁에 모셨던 일 기억하시지요? 그 때 제가 목사님께 “평생 목회하시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이 무엇입니까?”라고 여쭈었더랬지요.

그 때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평생 좋은 장로님들을 만나서 목회하면서 한번도 힘든 때가 없었고 늘 감사했다”고. 은퇴를 앞둔 이제야 저도 그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알겠습니다. 목회하면서 어찌 힘든 때가 없었겠습니까? 목사님은 이미 이 땅에서의 모든 은원과 명리를 벗어난 은혜와 초월의 세계에 들어가 계셨던 게지요.

1988년 부활주일에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말로 설교를 마무리했었습니다. “부활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차가운 땅 속에 묻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돌아설 때, 바로 그때 비로소 확연하게 깨달아지는 진리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체험적 부활신앙 안에서 이제 모든 무거운 짐 내려놓고 목사님 소원하신 대로 “영원한 그 나라에서 먼저 간 아들 동운이와 기쁨으로 재회하시고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멀지 않은 시간에 우리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 대구교회 신수철 목사 취임식 때 제 곁에 앉으시면서 “김 목사가 대구에 있어 내가 행복하다”라고 하셨지요? 그 때 저는 속으로 “이 어른이 아무래도 연세가 드신 모양이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평생 그런 말씀을 하실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곁에서 35년 여를 지난 지금 이제야 저도 말씀드립니다. 저도 류 목사님 같은 어른이 우리 곁에 그저 그렇게 계셔 주셔서 늘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류/연/창/ 목사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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