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전통을 담은 서촌 길을 걷다

숙종 때 사대부를 제외한 훈련도감 상번향군과 일반 백성들이 인경궁 터에 들어가 사는 것을 허락한다. 서촌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러나 돈과 권력을 가진 사대부들이 서촌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한다. 서촌은 주로 중인들이 사는 ‘작은 집과 좁은 골목길 동네’(閭巷)로 성장한다. 서촌 외곽 산기슭에 권문세가의 별서가 들어선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의 신분질서는 붕괴하기 시작한다. 서촌에 자리 잡은 역관·의원·화원 등 중인들은 새로운 역사의 주인으로 부상한다. 더 이상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 작은 집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서촌 중인들이 수성동계곡 너른바위에서 백전(白戰)을 치르고 난 뒤 지은 시문을 실으면 나귀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어느 듯 여항문인으로 성장한 중인들은 조선을 근대로 인도한다. 서촌 중인길을 걷는다.

▲ 서촌 순례길 지도.
부통령 집터 - 4.19혁명기념도서관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4번 출구로 나오면 눈 앞에 웅장한 대리석 건물이 나온다. 4.19혁명기념도서관이다. 1960년 2월 28일 주일 대구에 중·고등학생들은 등교한다. 민주당 대구유세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게 하려고 등교를 지시한 것이다. 등교한 학생들은 학원정치화에 반대하면서 시위를 벌인다. 3월 15일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들에게 경찰이 발포한다. 8명이 사망하고 78명이 총상을 입는다. 4월 18일 고대생 시위를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막는다. 4월 19일 교수들이 데모를 한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다. 두 달 만인 4월 28일 이기붕 부통령 일가족이 자택에서 자살한다. 시민혁명 승리의 현장에 4.19혁명기념도서관을 세웠다. 4.19 정신은 민주와 평화 그리고 통일이다. 4.19 정신을 제대로 구현했더라면 1980년 5월 광주에서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 경교장
국내 최초 정부청사 - 경교장
4.19혁명기념도서관을 나와서 강북삼성병원 정문을 지나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주변 콘크리트 건물과 달리 멋스러운 건물과 마주한다. 경교장이다. 황금광산을 개발해서 큰 돈을 번 최창학이 환국한 임시정부에 헌납한 것이다. 최창학은 비행기 값에 해당하는 거액을 일제에 기부하는 등 친일매국한 자다. 이리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정부청사가 된다. 그러나 환국의 기쁨은 그리 길지 않았다.

1949년 6월 26일 미군 방첩부대 정보요원이자 우익 자살특공대 대원 안두희의 흉탄에 맞는다. 경교장 2층에 그 날 그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그 이후 호의호식하던 안두희를 처단한 것은 박기서 의사다. 1996년 10월 23일 경기도 부천소신여객 버스 운전사였던 박기서 의사는 정의봉을 들고 안두희의 집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처단한다. 천주교회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한다. 안두희의 장례식을 천주교회에 부탁하고 경찰을 부른다.

새문안 - 돈의문박물관마을
경교장에서 도로를 건너면 돈의문박물관마을이다. 돈의문을 처음 세운 것은 한양도성 여덟 문을 완성한 1396년이다. 1413년에 폐쇄되어 사용되지 않고 대신 태종 때에 서전문(西箭門)을 새로 지어 도성의 출입문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세종 때인 1422년 다시 서전문을 헐고 그 남쪽 마루에 새 성문을 쌓고 돈의문(敦義門)이라 했다. 폐쇄했던 성문을 새로 짓고 활짝 연 해부터 한양도성 사람들은 이 문을 새문이라 불렀다. 그래서 지금도 길이름을 신문로(新門路)라 부르고 있다. 새문길이라는 뜻이다. 새문 돈의문 안쪽 동네를 일컬어 새문안이라 했다. 이곳에 돈의문박물관마을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경희궁 궁장을 발굴하고 민가의 온돌을 발굴하기도 했다.

한양도성 서쪽 성곽과 경희궁 궁장 사이에 회색건물은 도시재생사업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1932년 유한양행의 첫 본사다. 그 전에 사용한 종로통 덕원빌딩은 임대해서 사용하던 것이었다. 이 건물에서 유일한은 우리나라 최초로 종업원지주제를 시행한다. 1936년 주식회사로 전환하면서 주식을 1/10 가격으로 종업원에게 골고루 나눠준다. 우리나라 최초 종업원지주제를 시행한 것이다.

▲ 금오재 꽃담.
문성묘 각자석·구세군 영천교회
돈의문박물관마을을 빠져나와 성곽을 따라 단절되는 곳까지 걸어서 도로를 건너 어린이집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내려가서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길 가에 문성묘 터 영천교회가 차례로 이어진다. 문성공 율곡 이이 선생의 사우 문성묘가 있던 자리다.

문성묘 터인 구세군 영천교회 마당에 각자석을 탁본한 비석이 하나 있다. 남북이 분단될 위기에 처하자 후손들이 황해도 해주 석담 해전서원(海前書院)에 있던 율곡 이이 선생의 신주를 이곳으로 옮겨와 사당을 봉안했다. 각자석을 근거로 이곳이 율곡 선생의 집터였다고 잠정 결론을 내리면서 지난 1954년 서울시로부터 토지를 불하받아 1959년 6월 22일 율곡 선생의 서울 집터였던 이곳에 문성묘와 홍파강당을 지었다. 그런데 한 때 율곡 이이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이었던 이주영이라는 자가 은행융자를 받기 위해 개인명의로 전환한 뒤 명의를 반환하지 않고 있다가 저당 잡히고 돈을 빌려서 써 버린다.

문성묘를 보존하고자 하는 각계의 노력이 있었으나 14대 종손 이재능(李載能) 씨가 1971년 자진 철거함으로써 지금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게다가 최종적으로 토지를 매입한 구세군 영천교회가 1987년 율곡 선생의 각자석을 부수고 화장실을 지었다(유홍준, 1988).

▲ 체부동교회.
옛 체부동성결교회
황학정 아래 테니스장으로 빠져나가서 도로를 따라 왼쪽으로 끝까지 들어가면 배화여대 정문이 나온다. 배화여대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다가 왼쪽 골목을 보면 홍건익 가옥이다. 홍건익가옥 후문으로 빠져나가면 도로 건너편에 세종마을음식문화거리가 시작된다. 체부동시장이다. 체부동시장을 가로질러 끄트머리 조금 못 미친 왼쪽 골목길 안에 빨간 벽돌 건물이 있다. 구 체부동성결교회 체부동생활문화지원센터다.

체부동성결교회는 기도처로 시작한다. 무교정교회에서 누하동 기도처를 처음 시작한 것은 1920년 10월이다. 1924년 2월 통동에서 집회를 다시 시작하면서 주일학교를 중심으로 부흥이 일어나면서 1924년 7월 분립한다. 소아부흥회를 통하여 크게 성장한다. 성결교회 주일학교운동의 주요한 특징을 형성한 교회로 성장한 것이다.

체부동성결교회는 예배당과 사택 금오재(金五齋)로 이루어져 있다. 매주 금요일 다섯 명의 아이와 함께 예배를 드렸다하여 금오재다. 금오재는 조선집이다. 서울시에서 인수하여 복원수리하는 과정에서 금오재 마당 벽채에 가려진 꽃담을 발견한다. 시멘트를 걷어내고 복원한다. 예배당은 빨간 벽돌로 지은 서양식건물이다. 어디까지가 조선집이고 어디부터가 서양교회인지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예배당을 처음 건축한 것은 1931년이다. 신축 당시에는 프랑스식으로 벽돌을 쌓았다. 벽돌의 긴 단면과 짧은 단면을 번갈아 가면서 쌓는 방식이다. 정면에 같은 모양 같은 크기 출입문 두 개를 두었다. 출입문 두 개로 남녀를 구별함으로써 전통 유교윤리를 거스르지 않는다. 그러나 동일한 크기와 모양으로 만듦으로써 남녀가 평등하다는 근대사상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성도들이 늘어나면서 예배당을 확장한다.

원래 십자가 모양이었던 예배당을 늘려서 직사각형으로 만들어 늘린다. 이 때 늘린 부분은 영국식으로 쌓았다. 한 단을 쌓을 때는 벽돌의 긴 단면만 드러나게 쌓고, 그 위에 다음 단을 쌓을 때는 짧은 단면만 드러나게 쌓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종탑을 쌓으면서 출입문을 막았다. 출입문을 한 개로 줄이면 내부 공간이 늘어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두 개 출입문을 막을 때는 한국식으로 쌓았다. 한 예배당에 무려 3개국의 벽돌쌓기 방식을 동시에 적용한 독특한 건물로 남았다. 교회로 지키지 못한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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