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시절에 만난 그리스도

류재하 목사
송기식(宋基植)은 일제치하의 1940년 9월 3일(음), 서울시 마포구 염리동에서 송상훈, 윤경열의 6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6살 때 해방을 맞고 이듬해 용강초등학교에 입학, 우등생으로 공부하다가 5학년 때 6. 25 전쟁이 일어나 피난살이 하던 중 모친을 병으로 잃은 후, 그 영향으로 한 때 우울하게 지내는 등 사춘기를 일찍 맞았다. 그러나 머리가 영민한 그는 공부를 잘해 반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6. 25 후 처음으로 도입된 중학교 입학을 위한 제2회 전국학력고사에서 우수한 점수를 받아 당시 전국 일류 중학교인 서울중학교에 상위로 입학하여 당시 변두리학교인 마포 용강초등학교에서는 큰 경사를 맞은 듯 조회 때 그를 칭찬하고 후배들을 독려했다 한다.

가정에는 새엄마가 들어와서 전실 자녀들에게 잘 하였으나, 감수성이 예민하던 사춘기여서 누나와 그는 옛 엄마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적응이 안 되었다. 그는 중학 입학과 함께 누나를 따라 가까운 공덕감리교회를 처음 다니면서 마음의 공백을 신앙으로 채워보려고 했다. 그런데 몇 달 후, 무슨 일인지 집에서 거리가 먼 신수동성결교회로 옮겨 열심히 다녔다.

비록 작은 교회지만 목사님의 확신에 찬 설교와 친절에 끌려 남매는 그곳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어 열심히 다니다 고2 때(1956년) 담임 윤상현 목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다.

그 후 교회의 부흥회와 저녁집회에 계속 참석하면서 말씀의 감동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죄에 대한 회개를 통해 자신이 새로워짐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마음의 평안과 함께 모든 일마다 자기의 힘보다 더 큰 하나님의 크신 손길이 우주를 지배하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다 학생회 회장을 맡아 학생기도회를 조직하여 철야기도에 힘썼고, 가을에는 문학의 밤 행사를 열어 함께 신앙 시나 글을 발표했다. 이런 글들을 모아 1년에 한번 학생회지를 프린트로 발간하는 등 학생들의 신앙정서 함양에도 열심히 일했다.

그는 고3이 되자, 진로에 대한 고민 앞에 부딪쳤다. 당시 서울고 학생들은 거의 서울대나 연, 고대 등 소위 일류대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다른 학생들과 달랐다. 좋은 곳에 취직해 잘 먹고 살려는 목적으로 대학에 가는 것이 싫었다. 이를 위해 그는 밤마다 교회에 가서 혼자 기도했다.

그가 공부에 매진하지 않고 밤마다 교회에 가는 것을 본 부친이 걱정하기 시작했다. 부친은 서울대학의 법과나 상과에 가서 법관이나 은행원이 되어주기를 원했다. 이는 가난한 시절 모든 부모들의 간절한 꿈이었다.

이튿날 저녁 그는 수요기도회에 참석한 후, 목사님을 따로 만났다. “목사님, 제가 좋은 대학을 찾는데, 어떤 대학에 가면 되겠습니까?” “아, 송군이 찾는 학교는 바로 신학교일세. 신학교는 대학이 아니지만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는 목사를 양성하는 학교지. 송군이 간다면 내가 기쁘게 내 모교를 추천해 주지.”

그러면서 윤 목사는 서울신학교의 자랑을 몇 가지 들려주었다. 그것은 기도를 열심히 하는 학교, 성경을 은혜롭게 잘 가르치는 학교, 우수한 학생은 미국 성도들이 보내 준 장학금으로 큰 돈 없이도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기도와 성경을 잘 가르치는 학교라는 것과 등록금이 적고, 장학금으로 기숙사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크게 끌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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