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종교학의 영역에서 기독교는 여타 종교 중 하나로 인식된지는 오랩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종교 다원주의적 신학을 주창하는 부류들이 큰 비판 없이 한 자리 잡아갑니다. 그런 주장 안에는 설득력 있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갈래라는 얘기입니다. 종교의 종류가 달라도 종교적 지향점은 하나라는 논지로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고 있습니다. 심지어 신학이나 교회 안에서조차 말입니다.

정말 교회와 기독교 신앙이 지향하는 마지막 목적지가 세상 사람들이 종교적 노력으로 닿으려는 목적지와 같은 것일까요? 산 정상에 오르는 여러 길 중 하나로서의 가치만 있는 것일까요?

세상의 종교들은 종교적 노력으로 종교적 보상, 즉 산 정상을 얻습니다. 불가 스님들만 해도 산 정상을 향한 종교적 노력이 가상합니다.

성철스님이 수행했다는 장좌불와(長坐不臥)는 몸을 괴롭히기 위해 눕지 않고 앉아 있는 고행입니다. 소지공양(燒指供養)도 하는데 손가락에 기름 바른 창호지를 감아 태우는 고행입니다. 몸을 괴롭게 함으로 해탈의 경지, 산 정상에 닿으려는 수련입니다. 이런 오르기 어려운 산길을 올라 정상에 닿으려는 것이 종교입니다.

고행은 교회와 기독교에도 있는 수도의 방법입니다. 금식, 독거, 사막 교부들의 수행도 그 범주에 들 겁니다. 개혁자 마틴 루터도 무릎으로 성전 계단을 기어오르던 수도사였으니까요. 그러나 그의 깨달음은 다행스럽게도 그 고행의 무릎으로는 목적지에 닿을 길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체득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우리가 수행 정진함으로 산 정상에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산 정상, 혹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산 정상을 기어 오르는 우리의 가련한 모습을 보셨습니다.

당신의 처소는 우리의 미약한 수행과 정진으로는 닿을 수 없음을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당신의 자리를 버리고 우리에게 찾아오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다다를 수 없으니 당신이 찾아와 주신 날이 우리가 기다리는 성탄절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을 보내셨을 때, 성전 휘장이 찢어졌더랍니다. 제물 가지고, 제사장만, 정해진 시간에 겨우 들어가 하나님을 알현하던 시대가 끝났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아무 조건 없이 하나님 계신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중요한 메시지는 그 안에 갇혀 계시면서 동물들의 피로 드리는 제사만 받으시던 하나님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셨다는 뜻이 아닐까요? 고난의 발걸음으로 산을 기어 오르다 실패하고 낙담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시고, 앉아 계실 수만 없어서 자리를 박차고 나와 우리 곁으로 찾아오신 발걸음이 성탄절입니다.

2019년, 올 한해도 많은 목적지들을 설정하고 고군분투 해 오셨습니다. 신앙적 목적지들에는 얼마나 도달이 되었는지요. 나라의 평안을 위한 목적, 교회 부흥의 목적, 가정 경제 원활함의 목적, 개인적인 평안의 목적 들에 닿으시려다 혹시 오르기 어려운 산 정상이어서 기진한 상태는 아니기를 바랍니다.

더 간곡한 바람은 오르고 남은 나머지 부분들이 하나님이 마중 나오시는 영역일 거라는 변명 같은 안도감을 드리고 싶습니다. 집 나갔다 돌아오는 둘째 아들의 염치 없는 발걸음을 문밖까지 마중 나와 맞아 주시는 아버지의 발걸음이 꼭 그럴 것이라 여깁니다.

한해를 열심히 경영해 오셨으므로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나머지 영역들은 마중 나오시는 아버지께 맡겨 드리는 배짱이 믿음의 분량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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