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와 십일조

이성훈 목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일 만나를 내려 주시면서(출 16:4)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준행이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어의 ‘할라크’를 번역한 말로서 본래는 ‘(길을) 걷는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 만나 사건을 통해서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지” 혹은 “그렇게 하지 않는지” 하는 것을 시험(히.나사)하겠다는 것입니다. ‘시험’하겠다는 말도 히브리어 ‘나사’를 번역한 말로서, 훈련시키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날마다 거두게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지 그 신앙을 훈련시키겠다는 말씀을 통해 만나를 날마다 거두는 일이 결코 간단한 일만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만나를 날마다 거두는 일이 많은 수고와 전문적인 노동력이 필요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일에는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동반되어야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실 때에 각각 한 오멜씩을 거두고 남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만, 결코 많은 분량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만나를 다음 날까지 남겨 둠으로서 만나에서 벌레가 나고 냄새가 나는 역겨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들이 만나를 남겨 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만나를 조금 남겨서 내일 먹어야겠다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며, 둘째는 하나님이 오늘은 만나를 내려 주시지만, 내일은 안 내려주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여섯 째 되는 날에는 갑절로 거두라고 하셨습니다만,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감으로써 그들의 불순종은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그들이 불순종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오늘까지 비같이 내린 만나가 여섯째 날이라고 해서 갑자기 중단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비처럼 내리리니’(히. 마타르)고 할 때 히브리어의 ‘마타르’는 정말 비를 내린다고 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안식일에도 만나를 거두러 나갔던 이유는 만나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닌 자연현상의 일부쯤으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만나를 안식일을 위해 갑절로 거두지 않았던 이유는 만나에서 벌레가 나고 냄새가 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얻은 부정적 경험이 또 다른 불순종을 낳았던 것입니다.

신앙은 ‘단순함’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아이처럼 신뢰하였다면 하루가 지나 썩어버린 만나를 버리고 장막안의 냄새를 제거해야 할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헌금과 십일조와 같은 헌금생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십일조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겠다 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의 훈련입니다. 십일조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인데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 때문입니다.

내가 열에 하나를 드려도 “하나님은 나를 굶기지 않으시고 책임지신다”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불신 때문입니다. 십일조 마저도 내가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욕심이야말로 만나를 남겨두어서 내일 먹고자 했던 욕심과 무엇이 다를까요! 단지 대상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신앙은 단순함입니다. 십일조는 믿음 생활의 시작이자, 훈련입니다. 청지기 헌신예배가 있는 첫 달입니다. 직분자로서 이름에 걸 맞는 믿음의 길을 모두 걸어갈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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