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로서의 향학열과 그 활동

류재하 목사
그는 1962년 서울신학대학 졸업과 동시에 강원도 횡성군 수백교회에 총각 전도사로 첫 목회를 시작한 후, 이듬해 강원도 원성군 관설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당시 그는 향학열에 불타서 4시간 동안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에 와서 서울신대 대학원에 다녔다. 일주일에 이틀만 공부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꿈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는 1965년 대학원 졸업과 함께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교회 교육전도사로 중고등부와 대학생 담당 목회자로 일하다가 군목을 지원하여 1966년 5월 총회에서 목사안수 받았다. 그러나 군목 신체검사에서 고혈압으로 불합격 판정을 받아 돌아와 돈암동교회 부목사로 시무하다 1966년 최경자 양과 결혼했다. 그리고 이듬해에 1967년 충남 연산교회 담임목사로 본격적인 목회를 시작했다.

1968년에 충남 강경교회 담임목사로, 또 1973년에는 군산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이처럼 그가 조금씩 큰교회로 연속 청빙된 것은 그의 설교 때문이었다. 그의 소문에 1975년 대구에서 가장 큰 봉산교회 담임목사로 청빙 받아 일하는 동안 교회는 더욱 성장했다.

그가 교육의 도시 대구로 간 것은 그곳에 미션스쿨로 유명한 계명대학교가 있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그는 대구에 가자마자 계명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하고 목회하면서 연구에 힘썼다. 학교의 요청에 따라 계명대에서 기독교개론 강사로 수고하기도 했다.

그는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박사과정에 도전하여 가르치며 공부하다 뜻밖에 1980년 서울의 강남교회에서 청빙을 받고 상경하면서 당분간 박사과정을 중지하고 목회에 전심전력하므로 교회의 큰 성장이 있었다. 그리고 5년 후에 다시 박사과정을 계속 하러 주일 저녁 예배 후, 밤기차를 타고 내려가 월요일과 화요일마다 연구와 가르침에 매진하고 밤기차로 올라왔다.

마침내 그는 5년 후 1991년 대구 계명대학교 대학원 철학박사 학위(Ph. D)를 취득했다. 그의 논문 제목은 「묵자와 R. Niebure 사회사상비교」였다. 즉 그가 전공한 동양사상의 대가와 서양사상의 대가의 사회사상에 대한 비교 논문은 많은 기독교 학자들에게 큰 흥미와 새로운 시각을 던져주는 큰 주제였다고 전해진다. 

학위는 그의 불타는 향학열의 열매여서 모두들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그의 나이가 어느 새 51세가 된 때여서 너무 육체에 무리수를 준 것이었을까? 이때의 무리로 그는 지병을 얻어 평생 투병을 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당시는 요즘처럼 매스컴이 다양하게 발달되지 못해 교계의 월간지는 활천과 신앙계 정도였고, 주간신문은 크리스천과 교회연합신문, 그리고 방송은 CBS라디오 방송과 극동방송 정도였다. 그는 지방의 교회 재임 시 그곳 기독교방송이나 극동방송의 설교 시간을 반드시 활용했고, 서울에 와서도 일주일에 한 번 설교를 통해 많은 초교파적 방송 팬들을 확보했다.

또한 월간「활천」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약성경강해를 시리즈로 연재했는데, 교역자들은 물론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새롭고 은혜로운 강해설교로 큰 인기와 함께 실력을 인정받아 교단의 장로회를 비롯해 남·여전도회, 권사회 등 연합수련회의 강사로 초빙 받아 많은 활동을 했다.

이런 일화도 있다. 1990년이던가? 그가 박사 논문준비에 너무 바빠 당시 활천 주간인 필자에게 성경강해 연재를 쉴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할 수 없이 중단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지방의 어느 장로가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 와 “왜 송 목사님 성경강해가 빠졌는가?”고 항의해 온 적이 있었다. 그래서 필자가 그의 사정을 말하고, 학위를 받으면 곧 연재를 계속할 것을 약속하고 달랜 적이 있었는데, 이는 편집자의 ‘즐거운 비명‘이라고 할 수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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