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범 장로
우리는 너와 나의 관계속에서 살아간다. 관계를 떠나서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신과 인간과의 관계가 있었고 아담과 이브의 관계가 있었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가 있었다.

한문에서 사람을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말이다. 왜 사람을 인(人)이라고만 하지 않고 사이 간(間) 자를 써서 인간(人間)이라고 하였는가? 사람이 무엇과 무엇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 만남 없는 삶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의 만남은 현재속에 있으니 현재는 모든 이의 것이다. 연장자, 장년 그리고 어린이는 모두의 현재를 서로 도우며 미래로 이어가야만 한다. 즉 잉태와 출생, 성장과 교육, 사회활동과 죽음 중 어느 하나도 현재에 살고 있는 인간관계라는 과정을 떠나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관계는 선다적 관계의 그물속에 얽혀져 살아간다. 여기에 한 인간이 있다. 그는 여러 관계속에서 얽혀서 살아간다.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 또 형제와 자매의 관계, 사제 관계, 동료와의 관계, 선후배와의 관계, 상사와 부하와의 관계, 동향의 관계,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 성도와 성도의 관계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다양한 관계속에서 우리는 매일매일 삶의 여정을 이어간다. 그러기에 산다는 것은 관계한다는 것이다. 천애의 사고무친한 고아도 반드시 누구의 아들이거나 딸이다. 인간은 혼자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부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일컬었다. 그런가하면 탈무드는 ‘혼자 살려면 신(神)이 되든지 짐승이 되든지 둘 중 하나는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우리인간 역시 혼자서는 살수 없고 타인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서로 교류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무릇 인생은 너와 나의 만남이며 다른 사람과의 만남의 연속이다. 혼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처럼 인간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의 사람을 의미하며, 넓게는 집단내에서 상호 협동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이 완전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삶을 영위해 가야 한다. 이때 사회를 구성하는 각 개인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 작용적 교류 형태를 띄게 되는데, 이때의 주체는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또는 집단과 집단이 될 수도 있다.

무릇 사회란 하나의 커다란 장이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이처럼 사회적 존재란 말은 관계적 존재이다. 인생에서 관계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인생은 관계다. 인간은 나, 너라는 개별적, 주체적 존재인 동시에 나와 너라는 구체적 관계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이다.

무엇보다 사회를 형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친화 동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친화동기란 사람들이 타인과 관계를 맺고 유지하려는 본성적인 동기를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타인들과의 만족스럽고 효과적인 인간관계의 경험을 통하여 보다 풍부하고 보다 완성된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때 그 중에는 서로 자라난 환경이 다르고 가치관과 개성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그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살아가느냐가 우리의 삶의 행복을 가져오는 근간일 수도 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예외가 될수 없다.

오늘도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바른 인간관계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수학공식처럼 정해진 답이 없기에 우리의 지혜가 더 필요한 것 같다. 새해를 맞아 다양한 장소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 때 더욱 인간관계의 소중함이 피부적으로 와 닿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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