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1~9)

인생은 출발 자체가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모태에서의 어머니와의 만남, 출생해서는 다른 사람과의 만남 그리고 살아가는 만남 속에서 행복과 불행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복된 삶을 살다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한 사람도 있지만 반대의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어 복음의 대 사도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최고의 복음 전도자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만남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제일 먼저는 나와 나와의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속사람이 다른 나와 영의 사람인 나의 만남을 의미합니다. 그 어떤 만남보다도 나와 나와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은 완벽한 사람입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신뢰할만한 즉 자랑할 만한 것이 있었습니다. (빌 3:4~7)

육체적으로는 그 누구도 바울을 따라 잡을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교만할 대로 교만한 사람이요 대단히 의기양양한 사람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감히 “사울아, 사울아”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자기와 자기와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사울이 바울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고백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전 15:10)

이런 만남은 누구든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런 나와 나와의 만남을 중생이라고 합니다. 중생은 믿음이란 단순한 열심을 말하지 않습니다.(롬 10:2) 처음 믿음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때를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때를 말합니다. 즉 성령으로 거듭난 믿음을 처음 믿음이라고 합니다.

바울(작은 자)은 처음 믿음을 가진 후에 열심으로 주를 섬겼습니다. 중생의 체험을 한 후에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습니다.(고후 11:23~27) 사람들은 바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만족했습니다. 육은 물질만 있으면 만족합니다. 배고프면 먹으면 되고, 목마르면 마시면 되고, 추우면 입으면 됩니다. 물질만 있으면 육체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만족은 하나님과의 접촉이 있을 때에 가능합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환경이 어려우면 영이 육에 정복됩니다.

배고프면 하나님을 먼저 찾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을 찾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환경에 관계없이 영이 육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고후 4:7~8) 뿐만 아니라 감옥에 갇혀도 기도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행 16:25) 이것은 나와 나와의  만남이 이루어진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나와 나와의 만남이 있어도 갈등은 있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은혜를 받고 많은 사람을 회개하게 했으나 갈등이 있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성령 충만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 원치 아니하는 악만 행하는 도다”라고 했습니다.(롬 7:1~19)

오직 하나님만이 선하십니다.(시 107:1)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신과 자신과의 만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중생의 체험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에 나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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