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성장과 신앙생활

류재하 목사
이상훈(李相勳)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 1월 8일 강원도 원주군 봉산면에서 부친 이창우 씨와 모친 허성억 씨의 5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가 출생하자 이웃들이 그의 잘 생긴 외모에 놀라며,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거라고 덕담을 했다. 그는 자라면서도 부모에게 순종하였고, 장난을 칠 줄 모르고 늘 의젓하여, 동네 사람들이 ‘애 어른’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일본인 선생이 일본어로 여러 과목을 가르쳤다. 아예 학교에서는 우리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자, 그는 나라 없는 슬픔을 처음 느꼈다. 선생님이 가끔 일본학교를 자랑하자, 그는 일본어를 잘 배워 후에 일본유학을 가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1학년 때부터 반에서 가장 뛰어나게 일본어를 잘 해서 선생님의 칭찬을 날마다 받았고, 학생들에게 이상훈을 본 받으라고 했다. 그리고 모든 학과시간마다 그에게 반을 대표해서 일어나서 낭독을 자주 시켰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학의 재능을 보였다.

당시 일본의 교육은 봉건주의적 교육이어서, 잘하면 칭찬하고 못하면 손바닥에 매를 때렸다. 항상 단정하고 공부를 잘하는 그는 한 번도 매 맞아본 적이 없는 모범생이었다. 반에서 항상 일등이었고, 이것은 그의 졸업 때까지 계속되어 최우수상을 받고 졸업을 했다. 그때가 1943년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전쟁 승리를 위해 안간힘을 쓰던 때였다.

그의 실력으로 보면 서울에 유명한 중학교에 갈 수도 있었지만, 부모가 농촌에서 작은 농사로 겨우 생활하는 처지여서 떼를 쓸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원주에 하나밖에 없는 5년제 원주농업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하면서 처음 배우는 학과 중 영어에 가장 호기심이 갔다.

영어 첫 시간에 선생님은 학생들께 이런 말을 했는데, 이 말이 그의 일생을 좌우하게 된다.

“1학년 교과서가 영어의 기초이다. 건물을 잘 지으려면 우선 기초가 튼튼해야 하듯이 영어를 잘 하려면 1학년 때부터 잘 해야 기초가 튼튼해진다.”고 했다. 이 말에 그는 결심하고, 영어단어는 물론 1학년 영어교과서를 모조리 외어버렸다. 그가 영어를 잘 하게 되는 동기다.

그러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일본이 불리하게 되자, 적군인 미국과 영국의 글인 영어를 제한하는 적개심을 교육에도 보였다. 일주일에 5시간 있던 영어를 하루만 가르치거나 아예 영어를 폐지하기도 했다. 그는 쉬운 영어 책을 사전을 찾아가며 몰래 읽기도 했다.

그는 중학 시절, 영어와 함께 문학에도 관심을 보였다. 당시 전쟁으로 경제가 핍절한 중에도 일본에서 발행하는 이와나미(岩波)문고가 있었다. 이 문고는 세계명작소설이나 시, 수필을 일본어로 번역해서 발간했는데, 손바닥만한 작은 책으로 값도 저렴해서 학생들에게 큰 인기였다.

그는 주로 헌 책방에서 푼돈으로 빌려다 많이 읽었는데, 멋있는 구절들이 너무 많아 노트에 적어두었다 외우기도 했다. 이런 노트가 몇 권이 된다. 이것이 그의 언어구사에 활용되어 ‘음유시인’이거나 ‘황금 입’을 가졌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럼, 그동안 그의 신앙생활은 어떠했을까? 그는 다행히 어머니가 동네 교회를 먼저 다녀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신앙의 가르침 속에서 당시 주일학교에 열심히 다녔다. 선생님들의 열심 있는 설교와 성경동화에 흥미를 느끼면서, 그는 새로운 영적 세계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교회에서도 단정하고 모범생이어서 성탄절 연극에서 언제나 남자 주인공이었고, 계속 신앙이 성장하여 중 3때 학습과 세례문답에 합격해 세례를 받았다. 그는 곧 주일학교 교사로 임명되어 성경을 가르치고, 또 성가대원으로 열심히 일하므로 주위에서 칭찬을 받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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