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 때문에 말들이 많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아주 작은 단백질로 스스로 물질대사는 하지도 못하고 숙주가 있을 때만 유전 정보가 작동하여 자기 증식을 하는 희한한 존재이다. 그래서 생물과 무생물 사이에 있는 반생물이라 불리며 유행병의 감염원이 되기도 한다.

바이러스를 위시한 여러 유행병은 인류의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기도 했다. 우리 개신교 신앙의 연원이 되는 루터의 종교개혁도 그보다 한 세기에 앞서 유럽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초토화한 페스트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당시 유럽을 휩쓴 페스트는 무엇보다 사제 계급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기독교보편국가’ 체제였던 중세 유럽에는 인간 생사의 전 과정이 신앙적 의례로 규정되어있었고, 사제계급이 이를 관장했다. 따라서 숙환이든 감염병이든 일단 사람이 죽으면 그 시신을 사제계급에 보여야 했고, 사제들은 이를 공식적으로 처리해야만 했다. 그러니 감염병이 돌게 되면 가장 먼저 큰 피해를 보는 이들이 사제였다.

14세기 후반에 등장한 유럽의 페스트는 수차례 유행을 반복해가며 루터의 시대까지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그 결과 당시 많은 사제가 목숨을 잃었고, 덩달아 성직자 없는 교회가 늘어갔다. 다급한 바티칸은 무자격 사제를 양산하여 비어있는 교회의 수장이 되도록 하였다. 급하게 사제들을 배출하다 보니 10대 사제에, 심지어 10대 추기경까지 등장하는 등 당시 종교계의 정상적인 성직자 양성 시스템은 심하게 왜곡되어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교회가 제대로 기능할 수 없었고, 당시 민중들은 적절한 신앙 지도 역시 받기가 곤란했다. 거기에 더해 신앙생활은 사제와 교회라는 직제에 묶여있었으니 건강한 믿음 자체를 기대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런 배경 아래 루터의 ‘만인 제사장주의’가 등장한다. ‘오직 성서’, ‘오직 은총’, ‘오직 믿음’을 통해 모든 이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서 신앙적 접촉이 가능하다는 그의 선언은 사제와 교회라는 직제에 묶여있던 중세 가톨릭 신앙의 질곡을 깨는 도화선이 되었다.

코로나19 역시 중세의 페스트처럼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있을까? 우리는 루터의 경우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코로나19는 사람을 통해 감염된다. 그리고 이에 예외는 없다. 바이러스는 국적, 성별, 나이, 인종을 가리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바이러스 덕분에 지구의 모든 인간이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한 사람의 감염이 내 이웃을 포함하여 전 인류에게 영향을 준다.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바이러스 속성상 숙주가 필요하기에 사람이 모이면 감염 위험이 증가한다. 누군가 하나라도 감염자가 있다면 공동체 전체에게 위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예방적 거리 두기’를 실시한다. 이는 철저히 ‘이타적 행위’이다. 나만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배려이고, 공동체를 위한 선행이다. 아울러 인간이 하나임을 증명하는 고결한 신앙 행위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함께 겪어내는 ‘예방적 거리 두기’의 신앙적 의미를 깊게 새길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16세기 루터가 발견했듯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갖는 본질적 속성에 우리는 더 예민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믿음은 공동체 속에 이뤄지긴 하지만, 결국 하나님과 나 사이의 진솔한 관계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예방적 거리두기는 우리 같은 신앙인에겐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되새겨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 교회 역시 코로나19가 몰고 온 이 시련의 계절을 신앙의 본질적 관계를 다져보는 최선의 기회로 만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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