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과 거룩

이성훈 목사
어느 날인가 ‘성결교단의 정체성’이라는 제목에 눈이 머물렀습니다. 순간 레위기의 음식법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레위기의 음식법은 ‘거룩’과 ‘성결’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레위기 11장은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음식과 그렇지 않은 음식을 구별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정한 짐승은 발의 굽이 갈라져야 하고, 되새김질의 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따라서 소, 양, 염소, 사슴 등은 정한 동물에 속하지만, 굽은 갈라져 있으나 새김질을 하지 않는 돼지는 부정한 짐승에 속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이러한 음식법이 어떠한 배경에 근거하여 분류 되었는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제의적 설명에 의하면 부정하다고 분류가 된 동물들은 이방신들을 예배하기 위하여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동물들을 부정하다고 분류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소위 정하다고 여겨지는 부류에 속하는 소, 양, 염소 등은 이방인들의 제의에서도 사용이 되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수소 등은 바알 숭배자들에게는 바알의 상징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정과 부정한 짐승이 상징적인 의미여서 ‘정한 동물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야 하는 방법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견해 대로라면 구약에서 메시야를 상징하는 사자는 (창 49:9; 계 5:5) 왜 부정한 부류에 속하는가 하는 점은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더욱이 성경에서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단 8:20~21)를 표현하는데 사용되는 숫양이나 숫염소 역시 정한 것으로 분류가 된 점에 대해서 설명할 길이 없다는 데에 이 견해의 약점이 있습니다.

인류학적 견해를 주장하는 이들은 ‘거룩’을 그들이 속해 있는 부류의 속성에 부합하는 것을 의미하며, ‘부정’이란 창조질서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견해 역시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날개가 있으면서 땅에서 사는 닭과 오리 같은 경우 창조질서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정’한 동물로 분류되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위생학적 근거를 들어 ‘정’한 것은 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안전한 것들이지만, ‘부정’한 것들은 식용으로 사용하였을 경우 건강에 문제를 일으킬 만한 것들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의견 역시 낙타는 맛이 없다는 사실 외에 특별히 인간에게 악영향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한 동물로 분류되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정’한 것과 ‘부정’에 관한 문제는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되어온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은 예수님과 ‘거룩’과 ‘부정’에 관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왜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느냐(막 7:5)하는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다’(막 7:15-19; 마 15:11)는 답변을 하심으로써 정결법의 핵심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거룩’이란 단순히 음식법을 지킴으로써 이루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거룩의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을 구심으로 ‘나’에게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었음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간과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레위기에서 비록 문장에서 거의 생략 되었으나, ‘거룩하라’는 명령의 대상이 다른 이가 아닌 ‘당신’이라고 하는 2인칭 단수 대명사가 사용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둠이 깊이 드리운 시대입니다. 우리 모두 성결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함으로써 시대적 사명을 이루는 통로로 쓰임 받게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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