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극복을 위한 웨슬리안의 자세

박창훈 교수
지금까지 생각해보거나 경험해보지 못한 위기상황으로 사람들과의 대면접촉을 극도로 줄이면서 스스로에게 묻고 대답하는 시간은 늘어가고 있습니다. 질병과 치료에 대한 신앙 선배들의 활동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 예측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손길을 고백하며 신앙의 길에서 어긋나는 점은 없었는지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혹시 나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없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그럴듯한 제목으로 나 자신의 숨겨진 욕망과 야망을 하나님의 비전으로 포장해 주위 사람들을 몰아붙이거나 자신의 이익과 편의를 도모하지는 않았는지 철저하게 되짚어보아야 합니다. 은밀하지만 분명한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새롭게 의식하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자만이 성숙한 그리고 성결한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중병을 앓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두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병자들을 직접 치료하고 돌보는 의료진, 치료수단을 찾는 연구자들, 결정을 책임진 방역대책본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가족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특히 코로나19 희생자들의 다수는 노인과 기저질환자, 가난하여 밀집된 환경에 노출된 사람들입니다. 밀집지역에서 살며 일하는 사람일수록 전염병에 노출될 확률이 높습니다. 이들을 위한 기도는 웨슬리의 지적처럼 반드시 우리의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물론 모금을 하고 마스크를 모으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수 있는 공감 능력이 있는 신앙인들, 그래서 교회가 사회에 걱정을 끼치는 집단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한 존재임을 입증할 때입니다.

셋째, 예배와 교회의 존재방식에 대한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신학적 논의를 시작해야 합니다. 이번 사태로 우리는 전통적인 예배에 대한 변화를 요청받았습니다. 아직은 두렵고 떨리지만, 장소와 시간을 공유하는 예배가 장소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웨슬리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느 곳에서라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의 역동성을 본 사람입니다. 유비쿼터스(Ubiquitous)라는 말은 단순히 스마트폰의 광고문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편재성에 대한 서술어였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웨슬리의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는 말은 바로 지금 우리에게 예배의 영역이 확장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구호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결교회는 바로 예배의 장소와 형식 그리고 내용을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를 위해서라면 언제고 변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교회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날로그적인 만남과 교제를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로 금과옥조처럼 여겨오던 본인도 이제는 온라인 세계에 대한 준비가 없으면 교회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 시대가 되었다는 절박한 위기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예방과 치료를 위한 격리에서 파생된 배제, 낙인, 소외를 극복할 공동체적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웨슬리처럼 우리도 질병에 관한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해석과 대책에 있어서는 의료진들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이 사태가 누구의 잘못인지를 따져 물으려는 인식론적 메커니즘이 기계적으로 작용합니다. 어떤 사람, 어떤 지역, 어떤 나라에 대한 원망이 시시각각 일어납니다.

그러나 질병은 선과 악이라는 흑백논리로 구분할 수 없는 복합적인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방역이라는 이름으로 행할 수밖에 없었던 격리가 만들어낸, 배제, 낙인 그리고 소외를 이제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묻고 답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몫입니다.

임상의학에 기초한 의술은 빠르게 발달하지만, 상대적으로 축소되어가는 인간의 공동체적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왜’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하며 “함께” 살아내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에게 잔혹한 시험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또한 우리 모두의 절박한 구원의 시간입니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