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27:1~6)

어느 날 갑자기 숨돌릴 여유조차 없이 욥에게 고난이 밀어닥쳤습니다. 모든 재산, 명예, 자녀, 건강마저 잃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 욥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한마디 위로였지만 욥의 친구들은 일방적인 인과응보의 논리로 죄책감을 부추겼습니다.

본문 6절에서 욥은 친구들에게 자신의 지나온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노라고 맹세합니다. 욥의 맹세는 친구들에게 한 맹세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한 맹세입니다.

“하나님, 제 처지가 지금 이렇게 비천하게 되었지만, 지나온 저의 생애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완벽하게 살지는 못했지만, 부끄럽게 살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제가 저의 생애를 스스로 비웃는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저의 삶을 신실하게 이끌어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하여 제가 믿음으로 반응했던 세월을 부정하는 셈이 됩니다.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저의 공의를 굳게 붙잡겠습니다”

욥이 말하는 공의는 자신이 완벽했다기보다 자신을 신실하게 인도하신 의로우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하여 자신이 믿음으로 반응했던 지나온 삶을 소중히 여긴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변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근거없이 죄책감을 부추길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욥처럼 반응하십니까? 아니면 근거없는 회개를 반복하십니까?

며칠만 지나면 잠잠할 줄 알았던 코로나19 사태가 두 달여 지속되면서 교회 혐오 분위기가 전례없이 심각해졌습니다. “교회가기가 주저돼요. 잠잠해지면 갈게요. 우리 이웃이 우리 현관문에 붙은 교패를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 신경쓰여요. 고객이 제 책상 위에 있는 성경찬송가를 볼까 슬그머니 감췄어요. 전에는 교회 중직자인 것이 자랑스러웠는데 요즘은 누가 알까싶어 불편한 마음까지 들어요.”

일각에서는 마치 교회가 감염의 온상지나 된 것처럼 죄책감을 부추긴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욥의 태도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지나온 생애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비록 지금 비천한 처지로 떨어졌지만 욥은 하나님의 은총에 반응하며 살아온 자신의 삶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무시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남보다 의롭게 살았기 때문에 부끄러워할 필요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는 어디까지나 의롭다 함을 얻은 의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불의함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켜주신 그 은총을 믿는 우리에게 의롭게 여겨주시는 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 노력하며 애써온 지나온 삶을 부끄러워하기 보다 당당하게 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대속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부끄러움을 주님이 대신 당해주신 고맙고 자랑스러운 겁니다.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마스크를 쓰고라도 당당하게 성경책을 들고 교회로 나가 예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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