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세대 긋고 지난 업보가 어디 /망월리에 잠든 넋뿐이랴만 /한 시대가 쌓아올린 어둠의 낟가리에 /불쏘시개 되어 하늘 툭 틔우고 /황산벌 숯가마로 묻힌 저들이 오늘은 가는 달 붙잡고 묻는구나 /내 죄값을 달에게 묻는구나 /한 세대 긁고 지난 칼 자국이 /어디 내 죄값뿐이랴만 /내가 달과 마주서니 속물일 뿐이어서 /국화 한 다발도 속될 뿐이어서 /달로 떠오르는 네 외짝눈과 만나니 /부끄럽구나 /한평 땅 덮지 못할 내 빛 /무력한 근심이나 보태는 오늘 (고정희, 망월리 비명)

▨… 어느 선인은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羞惡之心) 사람일 수 없다고 지적했다지만 이 시대 이땅의, 사람들은 망월리 비명 앞에서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을 그 삶이 다하는 날까지 자신의 가슴에 새겨야 함을 고정희는 일깨워준다. “역사로부터, 진리로부터, 내가 경외하는 크고 환한 빛으로부터 저만치 비켜 선 어둡고 왜소한 나를 바라보면서, 눈 감아도 느껴지는 ‘비겁’이라는 단어를 감춘다”(‘나의 지성이 열망하는 지성의 가나안’)라고.

▨… 그러나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밝히지 못한 채 ‘남은 자의 부끄러움’만 확인하는 행태에 머물러버린다면 5.18민주화운동의 숭고한 투쟁은 역사의 한 에피소드로 전락해버리게 될 것이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은 지금, 우리는 그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우리사회를 지탱하는 기본정신으로 얼마만큼이나 재생시키고 있는가를 진솔하게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 그렇다. 우리는 우리사회가 민주화의 내용과 목표를 위해 어떻게 노력하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한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간의 기본권을 전제하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약속이 지켜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5.18민주화운동은 오늘의 시점에서도 살아있는 운동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길만이 5.18민주화운동의 숭고한 희생을 살리는 길임을 누가 부정할 수 있는가.

▨… 성서는 ‘남은 자’를 향해 ‘남은 자’의 부끄러움을 지적해주기 보다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책임에의 소명을 일깨워준다.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더 진실한 회개를 감당해야 하고 새 그루터기로 부름받은 소명에 겸손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신비하게 대치된 자임을 자각하여 민주화운동을 향하는 하나님의 의지를 바르게 증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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