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성서학원 교사신축확장

이종무 목사
경성성서학원 신축은 1920년 여름에 공사를 시작해서 1921년 3월에 완공했다. 공사를 맡은 사람은 중국의 기독교인 사업가였다. 신축건물은 남학생들이 사용하고 기존건물은 여학생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이 건물은 명동의 천주교성당이나 종로의 한성기독청년회관(YMCA)보다는 작았지만 서울에서 으뜸가는 양식건축물로서 장안의 명물이었다. 일반인에게는 5층 예배당으로 불린 이 건물은 성결교회의 유일한 신학교로 사용되었다.  

카우만 총리가 이러한 건물을 꿈꾼 것은 동양선교회 설립목적대로 먼저 한국, 일본, 중국의 선교에 대한 비전이 있었고, 한국이 동양선교의 중심지가 될 것을 예견하고 구상했던 것이다. 실상 성서학원의 건물은 구상했던 것보다 3분의 1이 작아졌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경제 불황이 극심하여 부득이 당초 설계보다 작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신학교 건물로서는 1953년 6·25전쟁 이후 서울수복 때까지 한국에서 제일 큰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성결(Holiness)을 상징하여 위에서 내려다보면 ‘H’자 형태이다. 수많은 신학생들이 기숙하면서 기도하고 성경을 보던 곳으로 기도와 눈물과 향학의 땀이 배어있던 유서 깊은 한국성결교회의 교역자양성소였다. 이 건물은 노후가 심해지고 붕괴의 위험이 있어 서대문구청의 행정요구에 의해 2010년 10월말에 헐리고 그 자리에는 아현교회의 웅장한 새 건물이 들어섰다.    

토마스 목사는 1910년 4월에 한국의 감독으로 부임한 뒤 1년 동안은 한국의 사정을 익히고 1911년 3월에는 경성성서학원을 창립하여 ‘성결운동의 정예요원’을 양성하는 한편 각 지방에 복음전도관 개척을 위해 열심히 순회전도를 했다. 1919년까지 22개의 교회가 각처에 세워졌다. 토마스 감독은 성서학원이 방학을 하면 가깝고 먼 거리를 가리지 않고 왕래 길에서 겪어야하는 고통도 마다하지 않고 산간벽지까지 찾아가서 교회를 세우며 양떼를 돌봤다.

한 예를 보이겠다. 1914년 5월 29일에는 통역담당 이장하 목사를 대동하고 부여 규암복음전도관으로 내려가서 묵었다. 다음 날 은산전도관설립을 위해 셋집을 얻어놓고, 규암전도관의 이명직 목사, 김혁준 전도사와 함께 규암마을에서 노방전도를 했다.

다음날 주일에는 규암전도관에서 구령집회를 열고 오후에는 노방전도를 하며 전도지를 돌리고 저녁에는 성별회를 열었다. 하루를 또 묵고 서울로 올라왔다. 1914년 8월 20일부터 토마스 감독은 카우만 총리를 모시고 이장하 목사와 영남지방을 순회했다. 9월 24일에는 은산 복음전도관 건물에 대한 매수 협의를 위해 규암복음전도관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서울로 올라왔다.

이렇게 토마스 감독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경기, 함경도 등 여러 지역을 바쁘게 순회했다. 예를 들어 교통이 열악한 당시 서울에서 부여 규암까지 가려면 서울에서 논산까지 기차로, 다시 논산에서 부여까지 인력거나 도보로, 다시 부여 백마강가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규암에 도달했던 것이다. 자동차가 없는 그 시절에 10년을 하루같이 한국의 영혼을 사랑하여 헌신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한국복음전도관에 함께 하셨다.

이처럼 토마스 감독은 그 바쁜 중에도 조선복음전도관에 파송된 최초의 선교사로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쉬지 않고 사역에 충실했다. 토마스 감독 부임이후 새로 설립된 복음전도관이 규암 아현 은산 김천 철원 경안 부산 밀양 등 16개가 된다. 당시 교단에는 아무런 헌법도 없었고 정치회의도 없어서 매사를 감독 혼자서 결정지어야 하므로 육신과 정신이 늘 피곤한 가운데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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