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성의 성장과 고관으로 항일투쟁

원세성 목사는 성결교회 역사상 특이한 존재였다. 그는 전통적 무관의 가문에 태어나, 무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의 시종(종2품)에 오른 고관 출신으로 을사조약을 반대하여 시위하다 관직을 잃고 기독교만이 소망임을 믿어 교회를 찾아 목사로 헌신한 양반전도자였다.

원세성은 조선왕조 말기인 1868년 1월 12일에 한성부 낙선방 인현에서 함경도 무산 부사의 1남 6녀 중 막내인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원주 원씨 문정공파 24세손으로 역대 무과에 등과한 벼슬가문이기에 전통적 유교와 유학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히고 공부했다. 15세가 되자 가문의 전통에 따라 무과에 급제하는 목표로 칼과 창을 쓰는 병기술과 승마술을 연마했다. 그는 가문의 기질과 체격에 따라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하며 팔(八)자 수염을 지닌 기상이 늠름한 대장부의 모습으로 성장했다.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마다 장차 장군감으로 예견하고 칭찬하는 등 그의 장래가 촉망되었다.

그가 17살이 되자 양반가문 남궁경신 양과 결혼한 후, 더욱 학문과 무예에 전념하여 마침내 그의 나이 25세(1885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의 벼슬길에 올랐으며, 1894년에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별군관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 후 1902년에 중추원 의관(議官)을 거쳐 시종원의 시종이 되었다가 2년 후에는 종2품으로 승차되었다.

원세성이 조선왕조의 고급벼슬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사정이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때는 19세기 말 일본과 청국을 비롯한 서양 강대국들이 군함으로 한반도에 몰려와 개화를 요구했으나, 고종의 초기에 집권한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나날이 나라가 불안했다. 그러자 대원군의 세력을 꺾고 고종의 친정에 성공한 후 명성황후는 각 국에 문호를 개방하도록 고종에게 건의했다. 마침내 고종은 부산을 비롯하여 원산, 인천, 군산, 목포 등 주요항구들을 차례로 개항하여 외국의 문물을 받아드렸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으로 승리한 일본은 반일감정을 가진 명성황후를 못마땅히 여겨 미우라 일본공사가 일인 깡패 자객들을 동원해서 왕비궁을 침입하여 황후를 살해하고 사체를 불에 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원세성을 비롯한 관리들이 분격하고, 반일(反日)감정을 지니게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을 통해 러시아를 조선에서 몰아낸 일본은 세력을 만주와 중국에까지 확장하기 위해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내세워 조선의 황무지 개발권을 매수하려고 했다. 이를 간파한 원세성은 더 이상 묵과 할 수 없어 시종원 동료들과 함께 항일단체인 보안회(保安會)를 조직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일진회를 규탄하고 황무지개발 반대운동을 펼쳐, 일본의 요구를 철회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1905년 일본이 친일파 이완용 등 친일5적들의 농간으로 을사보호조약을 획책하려는 기미를 알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원세성은 보안회원들과 함께 종로 2가 근처의 큰 길에서 시위를 벌였다가 무장한 일경들에게 무참히 체포되어, 관직이 파면되었다.

결국 그 해 8월 29일 친일5적들의 간계에 의한 서류에 고종황제가 수결(서명)했고, 이리하여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원세성은 11월에야 석방되었다. 원세성이 관직을 잃고 허탄한 마음으로 석방되어 나와보니 이미 그가 만든 ‘보안회’와 서재필이 만든 ‘독립협회’ 등 애국단체들이 모두 일제에 의해 해산되고 말았다.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계속>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