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로자 표창에 앞서 김창근 목사가 공산군의 남침으로 인한 재수난과 교회의 현황을 낭독할 때에는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1950년 6월 25일 공산군의 남침으로 교회당 전부가 파괴됨은 물론 수많은 성도가 순교를 당해 병촌 교회의 66명의 장·유년 신도 전원이 몰살당했고, 임자도교회에서는 문준경 전도사를 비롯한 43명의 순교자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교단의 중진으로 기둥 같은 역할을 하던 최석모, 박현명, 이건, 박형규, 김유연 제 목사도 악당의 손에 끌리어 북한으로 납치되어갔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리요. 저들은 희년을 당한 오늘날 북한의 차디찬 감옥에서 남쪽하늘을 바라보고 하염없는 눈물로써 이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으리라”는 대목에서는 모두가 눈시울을 붉혔다.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야기된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참혹하게 희생된 성도들과 교단을 이끌어가던 지도자의 빈자리가 너무나도 아팠고 아쉬웠던 것이다.

전국교회는 5월 26일 오전 11시 주일예배를 기해 일제히 전국 각 교회가 한 목소리로 “희년이 왔다. 희년이 왔다! 십자가의 복음으로 인한 대자유(大自由) 해방의 희년이 왔다!”라고 희년의 나팔을 감격스럽게 불었으며 이 때 김창근 목사가 정리한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50주년(희년)의 약사가 낭독되기도 했다.

성결교회는 희년을 기념하여 희년기념관을 건립했다. 동양선교회가 경비의 절반을 지원하고 나머지 절반은 한국교회가 부담하여 추진되었다. 성결교회는 처음에는 세례교인 1인당 100환씩을 모금하기로 하였으며 교세 규모 등을 고려하여 지역별로 차등을 두어 모금을 진행했다. 총예산은 3000만환으로 동양선교회의 원조 1500만환과 전국교회가 500만환, 특지의 헌납 500만환, 중앙교회가 500만환을 부담하기로 했다. 그러나 실제 총공사비는 3325만8700환이 소요되었다. 추가경비 325만9870환은 각 지방회와 부흥회 헌금, 사회사업협회 등에게 분담되었다.

건축헌금이 마련되자 희년기념사업위원회는 7인의 건축위원회를 구성했다. 동양선교회에서는 엘마 길보른이, 희년기념사업위원회에서는 김창근 황성택 천순봉 전승순, 무교동교회에서는 김우정 허준이 대표로 참여했다.

성결교회의 발상지인 무교동 12번지에 세워진 희년기념관은 1957년 9월 1일에 기공식을 한 후 1년을 넘겨 1958년 12월 1일에 준공했다. 총건평 378평에 2층 건물로 1층은 총회본부가 사용하고 2층은 중앙교회가 사용하게 되었다. 이 희년기념관은 가난한 신도들의 힘과 땀의 결정이요 동양선교회의 용기있는 협조가 있기에 가능했던 사업이었다.

희년기념사업위원회는 예정대로 출판사업도 진행했다. 이를 위해 1·4후퇴 때 피난수도였던 부산에 활천 속간 및 기타 출판을 위해 설치했던 인쇄기를 서울신학교 지하실로 옮기고 출판사업을 본격화했다. 해방 이전에 간행했던 성서영해전집, 창세기의 영적 연구, 개인전도학, 헌법, 구약사천년사 등이 중판되었고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과 관련된 주요서적들로 성결론, 휴거론, 재림의 복음 등을 출판했으며 교단 중진 50명 목회자의 설교를 모은 ‘희년설교집’도 출판했다. 성결교회의 출판 사업의 제2의 중흥기를 맞이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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