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같은 판사

문기선이 조선 역사상 최초의 변호사가 되자 그 해 창간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이를 크게 다뤘다. 그는 법조계 뿐 아니라 고난을 받는 조선의 민족에게 큰 위로와 희망의 빛을 던져주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 법조계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는 변호사직을 통해 억울한 조선인들을 변호하고 보호하려고 했지만 그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완전하게 장악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가급적 통제하기 위한 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불평등한 법으로 조선인들을 보호하고 변호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특히 일제를 반대하는 의병활동이나 조선의 독립을 위한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한 이유로 체포된 조선인들을 돕는 일은 한계가 명확했다.

또한 변호를 위해 찾아 온 사람들은 모두 가난하고 억울한 조선인들이어서 그는 법에서 정한 사례비도 받지 못하고 거의 무료로 변호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그의 생활은 항상 어려웠다. 그렇지만 그는 고난 받는 민족을 돕는다는 애족심에 따른 봉사로 보람을 느끼며 헌신했다.

그는 사건을 맡으면 밤을 세워가며 관련된 법 내용을 검토했고 피고를 도울 수 있는 법률적 검토를 치밀하게 했다. 그러한 노력으로 법정에서의 그의 변론은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렇게 일하다보니 그는 식사를 제 때 들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결과 영양실조로 인한 결핵증세가 나타났다.

자주 미열에 시달리고, 기침이 나고 가래가 끌었는데 감기 증상으로만 알고 감기약만을 복용했다.
어느 날 고열, 심한 기침과 함께 피가 섞인 가래가 나오면서 그는 결국 드러 눕고 말았다.

그를 찾아온 친구에 의해 병원에 가서 정밀 진찰하고 보니 결핵 4기 진단이 나왔다.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 결핵은 불치의 병이었고 이미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의사는 모든 일을 중지하고 공기 좋고 조용한 곳에서 휴양하며 병을 극복하라고 충고했다. 그의 나이 겨우 31세였다.

그는 마침내 결단을 하고 변호사 휴업계를 제출한 후, 함경북도 청진으로 휴양을 갔다. 어느 집에 하숙을 정한 후 평정한 마음으로 묵상에 힘썼다. 주로 부모로부터 배운 교훈의 말씀과 학교에서 배운 마음에 와 닿는 교훈을 음미했다.

1925년 어느 봄날 아침 그는 크게 울리는 종소리에 늦잠을 깼다. “이 근처에 교회가 있는 모양인가?” 그는 새삼스럽게 교회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그는 아침을 먹고, 종소리를 따라 교회를 찾아갔다. 가서 보니 신암성결교회였다. 마침 주일이어서 예배를 드리는 중에 그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전도사의 설교는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에 힘든 것이었지만 그는 설교의 내용을 깊이 알고 싶었다. 그래서 예배 후에 전도사를 만나 자기의 신분을 밝힌 후, 신앙에 대한 평소의 의문을 이것저것 질문했다. 담임전도사는 별 대답 없이 성경 한권을 주면서, “이 속에 질문 내용이 모두 있으니 찾아보라”고 했다.

그는 집에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동양적 윤리와 대치되는 것이 많았으나 계속 읽어 한 주간에 신구약을 독파했다. 그는 신약에서 산상보훈이 유교의 가르침보다 높은 교훈임을 알았다. 그리고 유교가 찾는 도(道)의 정체가 바로 예수님임을 발견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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