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마리아인이라는 책이 있다. 옥스퍼드대학 장하준 교수가 썼다. 그는 세계 시장의 패권을 장악한 부자나라들이 가난한 나라에서 경쟁자가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온갖 장벽을 친다는 의미로 ‘나쁜 사마리아인’이라고 표현했다.

세계 시장은 공정한 경쟁이 가능한 공간이 아니라는 얘기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세계화라는 구호 아래 세계무역기구(WTO)와 국제통화기금(IMF), 그리고 FTA와 같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안전장치를 겹겹이 만들어 두고 항구적인 패권체제를 유지하려 한다고 그는 비판한다.

이제 삼성 얘기를 해보자. 이건희 회장은 21년 전 경영권을 승계한 뒤 반도체 사업에 모든 것을 걸었다. 일본과 미국 등 선진국이 쳐 놓은 높은 기술 장벽을 뚫고 말이다. 이후 삼성은 브랜드 인지도 세계 59위의 초일류 기업이 됐다. 매출은 국내 총 생산의 18%에 이른다. 주식의 시가 총액은 전체 상장사의 20%, 수출 비중은 21%다.

장 교수의 말대로 세계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자신들이 정상에 오를 때 사용한 사다리를 딴 나라는 이용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걷어차고 있는 상황에서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러나 빛이 찬란할수록 그림자도 짙은 법. 삼성 주변에서는 정경유착과 광범위한 로비활동, 그리고 경영권의 편법 승계 논란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삼성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오너 일가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면서 국민 세금과 정부의 보호로 성장했고 이를 사적이익에 활용했다고 주장한다. 탈세하고 노조를 파괴시키며 세습경영과 공작정치로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고 공격한다.

그들은 삼성이 거듭나려면 왜곡된 지배구조를 청산하고 기업 투명성을 높이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갖추라고 요구한다. 대선자금 수사 과정이나 안기부 X파일 파문 등을 보면 공감이 가는 부분도 적지 않다. 실제 삼성의 70년 역사를 돌아보면 법과 제도의 허술함을 악용하고 불의한 정권에 편승한 측면이 있다. 특히 이재용 전무에게 경영권을 넘기는 과정은 지나치게 이기적이었다.

정부는 증여와 상속, 순환출자 등과 관련된 법과 제도를 삼성이 취하는 조치를 뒤따라가면서 바꿨다. 국세청의 한 관리는 우리나라의 조세정책은 삼성과의 투쟁의 역사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삼성의 성공을 악덕기업의 상술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서슬 퍼렇던 군사독재 시절 권력자들이 기업의 금고를 자기 지갑처럼 여길 때 그것에 저항한 기업은 살아남기 어려웠다. 로비가 없으면 관료조직이 움직이지 않아 급행열차를 타기를 주저하는 기업이 오히려 조롱받았다.

편법과 탐욕이 개입되기는 했지만 삼성이 국내에서 이룬 기반으로 나쁜 사마리아인이 우글거리는 세계시장에서 일류기업으로 성장했다면, 그리고 그것이 국민 경제에 큰 유익을 끼쳤다면, 우리는 허물을 잊지는 않되 성과에 박수를 쳐주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고 본다.

혹자는 철저한 윤리경영으로 존경받는 기업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유한양행의 사례를 들면서 말이다. 그러나 일찍부터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고 권력의 부당한 요구를 듣지 않았던 그 기업은 존경받는 알짜 기업일지는 모르지만 세계 초일류 거대기업을 지향하지는 않았다.

21년 전 삼성이 반도체에 ‘올인’한 것은 지금의 기준이었다면  추진자체가 불투명해졌을지 모른다. 수많은 계열사를 거느리고 총수의 과감한 결단으로 운명을 결정짓는 재벌기업의 에너지가 우리나라를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이끈 견인차였다는 것은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이건희 삼성회장이 경영에서 손을 떼겠다고 밝혔다. 이재용 전무의 후계자 지위도 거둬들이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만약 이회장의 발표에 진정성이 있다면 그의 용기와 결단은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삼성이 지금의 성과에서 한 단계 더 도약하려면 반대자의 주장대로 선진화된 기업지배구조를 가져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최고의 기업이 시대의 요구를 먼저 읽고 선도해 나감으로써 산업전반에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고치려는 움직임을 확산시킬 수도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희망이 보인다. 삼성이 70년 역사를 넘어 국민 모두에게 존경받는 거대기업으로 계속 성장해주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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