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로운 법관생활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일제가 패망하고 조선에 해방이 찾아왔다. 38도선을 중심으로 남한에 미군이,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했다.

그는 해방된 조국에서 소신껏 일하기 위해 청진으로 갔으나 공산주의 세력이 기독교를 핍박하자 자유와 신앙을 찾아 38선을 넘어 서울로 왔다. 당시 남한은 미군정 아래에 우익과 좌익의 충돌로 사회가 극도로 혼란했다. 그는 미군정청의 요청을 받아 판사직을 임명 받았다. 건국하기 전 요인암살사건들이 계속 일어나 판사들은 골치를 앓았지만 정의를 구현한다는 취지에서 최선을 다했다.

1948년 8월 15일. 초대 이승만 대통령 취임과 함께 대한민국의 개국이 선포되었다. 그는 일제 때 나라 없는 설움을 겪었기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했다. 국회와 함께 행정부와 대법원이 창설되었다. 그의 성품을 잘 아는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씨는 그를 청주지방법원장으로 임명했다. 이후 그는 10여년 동안 여러 지방법원장을 역임하게 된다.

그는 청주에 도착하자마자 성결교회를 찾아갔고, 주일에는 장로로 하나님께 충성하고 평일에는 법관으로 국가에 봉사했다. 개국 초기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자유당이 집권하여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 부정을 많이 저질렀다.

자유당은 장기집권을 위해 선거 때마다 공무원들을 선거요원으로 활용했고, 이권과 돈으로 지하 비밀조직을 수십여 개 거느리며 선거부정을 단행했다. 야당이 적발하여 고발한 것이 전국적으로 수십 건이 되었다.

그가 청주지방법원장 재임시 국회의원 선거에서 태극도 교주의 부정선거가 고발되었다. 태극도라는 유령 종교집단은 자유당의 비밀조직으로 충청북도에서 “자유당 후보를 찍어야 복을 받는다”고 선전하며 투표를 강요하거나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그 결과 자유당 후보가 당선되었고 야당에서는 태극도 교주를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했다. 자유당에서는 대법원에 압력을 가해 무마하려고 했으나, 김 대법원장은 문 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소신껏 하라고 격려했다.

문 원장은 무엇보다 태극도가 종교를 빙자한 집단인 것에 분노했다. 그래서 태극교주와 간부들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그는 판결문에서 “종교는 양심의 법에 따라 사는 사람들인데, 종교를 빙자하여 양심을 어기고 정권에 아부하는 하수인 노릇하는 것은 무엇보다 큰 죄이기 때문에 중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하여, 종교의 사회적 책임을 일깨우는 강연을 했다. 자유당에서는 김 대법원장에게 문 원장을 좌천시키라고 압력을 넣자 김병로 대법원장은 오히려 문 원장을 대전지방법원장으로 승진시켰다.

그래서 그는 대전지방법원장으로 전근했다. 그는 먼저 대전성결교회를 다니며 장로로 충성하고, 평일에는 추상같은 법관으로 국가에 충성했다. 대통령 선거가 있던 1956년이었다. 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 씨가 유세 중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이승만이 당선됐다. 이 과정에서 자유당의 부정선거가 많았다.

당시 대전 부시장이 선거법 위반으로 야당에 의해 고소당했다. 부시장은 지위를 이용하여 공무원들을 선거요원으로 활동시킨 것인데, 만약 유죄판결이 되면 자유당의 치부가 드러나 권위에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래서 여당에서 대법원을 위시하여 그에게 까지 잘 봐달라는 청탁과 고위승진을 약속했다. 문기선은 분노했고 문 원장은 판사들에게 소신껏 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이 사건은 유죄로 판결이 났고 야당은 자유당을 일제히 정치공격하여 자유당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정규인사 이동에서 대법원은 자유당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문 원장을 전주지방법원장으로 전임시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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