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재판소장과 법관의 가문

문기선이 좌천되자 당시 야당지 동아일보에 관련 내용이 크게 실려 의로운 법관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가는 곳마다 법원 직원들에게 훈시를 통해 법관들이 먼저 법대로 소신껏 하는 것이 준법이고,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에 실현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전주에서도 큰 일이 터졌다. 소위 이철승 의원의 공무집행 방해사건이었다. 이철승 씨는 당시 전주 출신 야당의 30대 국회의원으로 국민의 주목을 받는 인물이었다. 총선에서 그를 꺾기 위해 여당은 장관 출신 거물급 후보를 내세우고 돈을 뿌렸으나, 이철승 씨의 인기가 더 높았다.

자유당은 선거관리위원장을 매수했다. 투표가 끝나고 개표를 할 때 이철승 씨 표 수십 장이 여당표로 계산되었다. 이를 적발한 야당 참관인이 항의했지만 선거관리위원장이 그냥 넘어가려고 했다. 분노한 이철승 의원이 일어나 항의하며 선거관리위원장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개표가 중단되었다. 이 의원은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 사건이 여야간 정치문제로 비화되어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문제는 법정판결이어서 여야간에 문 원장에게 청탁이 왔다. 문 원장은 이철승 의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는 판결문에서 이 의원이 공무를 방해한 것은 잘못이지만 민주주의 뿌리인 의원선거에서 개표의 부정을 시정하지 않고 진행한 선거관리위원장에게 더 큰 잘못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부정을 막기 위한 이 의원의 방해는 국가 정의구현을 위한 분노였고 더 나아가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의지의 표현이다’라는 요지였다. 그래서 이 의원은 석방되었고 여당은 문 원장에게 이를 갈았다.

이런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자 문 원장은 영웅으로 떠올랐다. 며칠 후, 문 원장은 김병로 대법원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문 원장, 수고했소. 그런데 당신은 판결문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말하는데, 도대체 당신은 목사요, 판사요?” 그러자 문 원장은 태연히 말했다. “저는 목사 같은 판사입니다” 그 말에 김 대법원장도 껄껄 웃고 말았다고 한다.

문 원장에게 몇 번이나 당한 자유당은 자기들에게 협조하지 않은 법관들을 제거하기 위해 재 신임제도를 국회에서 강제로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대법원장의 임기가 끝남과 동시에 문 원장을 판사 재임에서 누락시켰고 결국 문 원장은 법관의 옷을 벗고 변호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판사보다 변호사가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다고 하지만 그는 불의한 사건은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맡지 않았다. 한 예로 박태선 교주의 부정사건에 변호의뢰가 왔다. 막대한 보상을 약속했지만 그는 박태선 교주가 반사회적이고 기독교 이단이기 때문에 단호히 거절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자유당정권이 무너지고 야당이 집권을 하자, 그는 혁명재판소장으로 임명되어 혼란한 정국을 잘 수습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 모두 체포되었지만 문 변호사만은 무사했다.

그의 삶은 법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구현이 목표였기에 곤궁하게 살았지만, 하나님과 사람 앞에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누리다 1971년 75세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그의 숭고한 뜻을 따라 아들 3형제(영극, 영우, 영길)가 모두 판사와 검사출신 변호사로, 그리고 원로장로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
<끝>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